선교의 수호자, 동방의 사도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람이 온 세상을 얻을지라도 영혼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이 말은 학문으로써 장래가 극히 촉망되며 성공과 명에, 특권의 생활이 그의 앞에 놓여 있던 한 젊은 철학 교사에게서 여러 번 반복된 것이다.그 당시 24세이던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는 파리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이 충고에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그는 이냐시오 로욜라와 사이좋은 친구가 되었다. 이냐시오의 끈질긴 설득은 결국 프란치스코를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했다.

프란치스코는 이냐시오의 지도 아래 영적 훈련을 했고 1534년에는 그의 작은 공동체인 갓 창설된 예수회에 들어갔다.
그들은 함께 몽마르트르에서 교황의 지시에 따르는 청빈과 정결 그리고 사도직 수행에 관한 서원을 했다.

프란치스코는 1537년,그가 사제 서품을 받은 베니스를 떠나 리스본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동인도로 항해하여 인도의 서쪽 해안인 고아에 상륙했다. 그후 10년 동안 그는 인도인들,말레이 인들,일본인들 등 사방에 흩어진 국민들의 신앙을 깨우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그곳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며 그들의 초라한 음식과 잠자리를 함께 나누었다.
그는 병든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특히 나병 환자들을 위해 봉사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때로는 잠잘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빴으며 심지어는 성무일도를 바칠 시간조차 갖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언제나 하느님의 현존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그의 편지에서 알 수 있다.

프란치스코는 말레이지아 섬을 거쳐서 일본으로 갔다.
그는 일어를 열심히 배워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고 교훈을 주고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자기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전교 본부를 마련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중국으로 가기를 원했지만 이 계획은 중국 본토에 도착하기 전에 그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흔히 그는 사도 바오로(Paulus)에 버금가는 위대한 선교사로 불린다. 그는 수많은 위험과 역경을 딛고 상상할 수 없는 거리와 지역을 여행하였고, 그 자신이 개종시킨 교우 수만 하더라도 1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그래서 그는 ‘인도의 사도’, ‘일본의 사도’라고 불리며, 1619년 시복되고 바로 이어서 162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Gregorius XV)에 의해 자신의 사부이자 동료인 예수회의 창설자 로욜라(Loyola)의 성 이냐시오(Ignatius, 7월 31일)와 함께 시성되었다. 그리고 1927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는 그를 리지외(Lisieux)의 성녀 테레사(Teresia, 10월 1일)와 함께 '가톨릭 선교활동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