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ASTASIS basilica-cattedrale-patriachale-di-san-marco-venezia-11th-c.jpg : 박병관 사도 요한 신부님의 부활성야 강론(2015)10253844_10100115328792175_144910132353027221_n.jpg : 박병관 사도 요한 신부님의 부활성야 강론(2015)ANASTASIS basilica-cattedrale-patriachale-di-san-marco-venezia-11th-c.jpg : 박병관 사도 요한 신부님의 부활성야 강론(2015)

<박병관 사도요한 신부님의 부활성야 강론>

2015 부활 성야

(원효로 성심 수녀회)


이태리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대성당에 11세기에 만들어진 모자이크로 anastasis 곧 부활 이콘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죽음의 지하 세계에 내려가 늙은 아담을 이끌어내고 있는 아주 뭉클한 장면입니다. 왜 그런지 올해 사순 기간 내내 바라 보았더랬습니다. 내 안에서 오래된 낡은 인간, 늙은 아담이 더 느껴져서 일 것입니다.


시선을 특별히 끈 것이 있었습니다. 까만 상처를 지닌 부활한 그리스도의 힘찬 손이 아담의 오른 쪽 팔목을 잡고 끌어 당겨 아담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왜 팔목일까? 즉시 늙은 아담의 믿을 수 없는 손, 그 속수무책인 무기력의 상태가 떠오르면서, 바로 그것이 내 안에 있는 늙은 아담의 모습임을 보게 되었습니다.아! 부활의 주님! 제 안에 있는 늙은 아담에게도 어서 오셔서 팔목을 잡아 일으켜 주소서하고 마음에서 제법 간절한 고백이 나옵니다. 구원자가 필요한 자신에 대한 주제파악이 조금 더 깊어졌을까요? 더 두고 볼일입니다.


모자이크를 또 자세히 보니 익살스럽게 생긴 괴물이 -- 죄를 표상하는 지, 인류의 원수를 나타내는지 -- 사슬에 이리 저리 묶여 있으면서, 그래도 한 손으로는 아담의 한쪽 발끝을 끝까지 붙잡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끈질긴 놈! 이래서 나의 늙은 아담은 그렇게도 고질적인 수인의 상태가 되어있는 것이로구나. 깨달음이 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영광스러운 빛의 원천이어서 황금빛으로 채색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십자 나무를 들고 그 괴물을 밟고 승리자로 서 있습니다. 아니 옷깃이 나부끼는 것을 보니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고 위를 향하여 상승하여 움직이는 부활의 운동 가운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부활하신 주님과 같은 황금빛 배경의 모자이크 공간 전체에서 하느님 생명의 숨결의 미묘한 현존이 느껴집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얼굴은 pantocrator 곧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으로서의 권위가 있으면서도,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도 같은 자애롭고 그윽한 눈매로 뒤를 돌아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러고 보니 늙은 아담 곁에서 늙은 이브도 또 필경 구약의 인물들일 네 명의 사람들이 간절한 표정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양손을 들어 올려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대하던 구원자의 도래에 대한 기쁨과 찬미와 감사의 용약일까요? 아, 아담의 왼 쪽 손도 같은 손짓을 하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러고 보니 무기력했던 아담의 정강이에 힘이 생기고 있고 아담이 깨어나며 그것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기에 아담의 표정은 형언할 길 없는 그의 영혼 속 깊은 느낌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쯤 해서는 할렐루야!하고 탄성이 나옵니다.

다른 한쪽에는 신약 시대 이후의 성인들 같은 사람들 셋이 모여있습니다. 그들은 경이로운 시선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삼위일체 그리고 강생하신 영원한 말씀의 신성과 인성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손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 중 하나는 세례자 요한인지 그 손짓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가리켜 증언하며 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이 파스카 신비, 곧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깊이 관상하고 곰곰이 숙고하여 나누고 있는 대화가 들리는 듯 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마음 속에 울리고 있는 삼위일체의 영원한 대화를 엿들어 아는 듯한 그들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고, 또 나도 뭔가 이야기하고 싶어집니다.          


산 마르코 대성당의 anastasis 이콘은 파스카의 객관적 구원의 현실을 그 본질에 있어 군더더기 없이 분명히 드러내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원의 창이 되기에 바라봐도 바라봐도 좋고 깨닫는 바가 있게 하며 마음을 고양시킵니다.


친애하는 친구들이여, 부활은 우리의 느낌에 있지 않습니다. 부활을 우리의 감정 안에서 찾으려 하지 맙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시간과 죄 속에 사는 우리 인간들의 삶에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고통과 슬픔, 그 부패와 죽음이라는 막다른 지경에 대한 가시적 출구임을 선포합니다. 이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놀라운 구원의 업적을 통해 인간과 우주의 역사에 들어온 객관적인 현실로서, 종말론적으로 절대적 미래로서 확립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금도 부활로 변모된 시공 그리스도의 부활의 운동이 일으키는 그 미묘한 바람 안에서 숨쉬고 살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상의 순례자로서의 우리의 부활의 삶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삶의 질곡 그 바로 한 가운데서도 자신에게 매몰되어 숨지 않는 것이고, 삶의 구체적 현실을 손에 들고서 우리 삶의 절대적 출구이며 미래인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향하는 것이고, 그 영원한 말씀과의 대화에 들어가는 삶입니다. 우리는 영혼을 담은 그 진솔한 대화를 통해서만 부활의 힘을 깊이 그 원천에서 길어 올릴 수 있고, 그럼으로써 삼위일체 하느님의 영원한 대화에 포섭되어 변모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부활의 삶은 이런 대화와 변모의 과정이고 경험입니다.


하지만 새 노래로 주님을 찬미할 이유가 더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약속하신

대로 우리 제자들을 고아로 남겨두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이미 오고 계시고, 당신 부활의 현존을 우리 삶에서 알아차릴 수 있게도 해주십니다. 그 복된 만남은 우리 자신의 부활로 체험하는 때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그 부활은 더 참된 신앙, 더 순수한 사랑, 더 옹골찬 희망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 부활 체험을 위해 요청되는 것은 사랑 안에서 신앙의 눈으로 하는 식별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식별하는 사랑! 이 사랑 안에 성장하는 사람은 복됩니다.    


친애하는 친구들이여, 주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 드리고, 우리의 부활도 축하합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