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예수회 웹사이트에서 퍼옴**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의 평신도 영성>


By Thomas H. Green, S.J.


크리스챤 영성의 역사에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교회의 역사를 통해 있었던 커다란 종교운동의 대부분은 본래 평신도 운동이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막의 교부들이나, 베네딕도회, 프란치스꼬회 등이 그러하다. 하지만 도미니꼬회나 예수회의 경우는 그들의 사도직과 카리스마에 따라 처음부터 성직수도회로 출발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와 성직수도회에서는 평신도에 대해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예수회 전통 안에서도 “이냐시오 영성”과 “예수회 영성”을 구분하여 성찰하고 있는데, 후자는 특별히 예수회원들만을 위한 것이지만, 전자는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 초대된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다.

용어 해설

이 러한 구분을 바탕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평신도 영성”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우선, George Lane가 “Christian Spirituality"에서 정의한 것에 따르면, 크리스챤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관계를 형성하는 개인적인 여정이다. 우리는 한 가지 생활 방식 안에 결코 그리스도 전체를 포함할 수 없기에 교회에는 다양한 ‘영성들’이 존재하고 있다. 예를 들어, 프란치스코 성인은 예수의 가난으로의 부르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도미니칸 성인은 복음 선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두 번째, “평신도”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교회법적인 용어로 평신도란 사제가 아닌 모든 이들을 의미한다. 즉 수녀와 수사들 역시 평신도에 포함된다. 그러나 ‘평신도 삶’의 보다 일반적인 의미는 사제들과 수도자들의 삶과는 상반되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따라서 평신도는 사제나 허원을 한 수도자가 아닌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불림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것이 우리가 논하고자하는 평신도 영성의 일반적인 의미이다.

가톨릭교회에서 가장 최근에 있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는 “교회의 자기 이해” 측면에서 큰 전환점이 되고 있다. 그럼 필자가 “Come Down Zacchaeus"(1988)에서 평신도 영성에 대해 언급하였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변화된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개념들을 짧게나마 훑어보도록 하자.

피라미드 구조의 변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소개된 변화된 개념을 설명함에 있어 피라미드의 이미지가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과거에는 교회를 피라미드 구조로 보아왔다. 최상위에 교황이 있고 그 하위에 주교, 성직자 그리고 수도자들이 계층적으로 뒤따르고 있으며, 평신도들은 참된 성스러움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피라미드 구조의 맨 아래 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이미지를 사용한다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이러한 피라미드 구조를 바꿨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평신도는 예수의 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이다. 교회 내에 있는 다양한 사도직에는 이제 높고 낮은 단계의 성스러움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리스도 공동체 내에서 각각 다른 봉사의 역할이 있을 뿐이다. 오래전 성 아우구스띠누스는 매우 아름다운 표현을 하였다. “당신을 위해 저는 주교입니다, 당신과 함께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전자는 제게 짐이나 후자는 제게 기쁨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새로운 시각은 공의회가 “하느님의 백성(the people of God)"이라는 핵심적인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깊이 성찰되어졌다. 사실 이러한 시각은 바로 예수 자신의 교회에 대한 인식이었으며 우리는 이것을 요한복음 13장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아름다운 신비체 이미지로부터의 변화를 의미한다. 즉, 후자는 비록 철저하게 바오로적이고 풍요로운 표현이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강조하고자한 거룩함으로의 보편적 부르심인 ”하느님의 백성“은 표현하지 못하였다.

사제, 예언자 그리고 왕으로서의 평신도

신약성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사제요, 예언자요 그리고 왕이셨다. 예수는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께 희생제물을 바치셨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새로운 하느님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 시대가 흐르면서 이러한 세 가지 타이틀은 주교들에게 그리고 사제들에게 사용되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적, 예언자적 그리고 왕으로서의 역할이 바로 주교들과 사제들에게 주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강조하는 것은 모든 크리스챤, 모든 평신도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즉, 주님의 포도밭 안에서 사제로서, 예언자로서 그리고 왕으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사제로서 우리는 우리들의 가정과 우리들에게 맡겨진 세상일들을 축성하고 그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성스러운 제물로 만든다. 예언자로서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과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우리는 왕으로서 우리의 가족들 또는 사회의 한 공동체의 책임을 맡게 되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폭군이 아닌 바로 예수의 대리자로서 그 공동체의 참되고 진실된 왕이 되는 것이다.

평신도 영성의 중심이 되는 기도

이 러한 적극적인 평신도 소명에 대한 인식은 이미 초기 교회의 교부들에게도 있었다. 특히 레오 교황은 5세기 사람들에게 이와 유사한 정신을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모든 평신도들의 성스러운 3가지 소명에 대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강조는 우리 시대에 있어 확실히 새로운 시각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동시에 평신도 성소의 고귀함을 강조하는 것이며, 현대 미션의 도전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성 레오 교황이 이미 강조했던 것처럼, 공의회는 평신도 영성의 중심으로 기도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깊게 뿌리 내리고 기도하는 사람만이 앞서 언급한 사제직, 예언직 그리고 그들의 가정과 공동체에서 참된 왕으로서의 역할을 구현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인가 받았을 때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인격적으로 우리 안에서 실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어줄 수 없다.

이 글의 초점이 일반적인 평신도 영성이기에 성 이냐시오의 영성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이냐시오식 기도는 평신도 영성에 매우 잘 부합됨을 언급하고자 한다. 성 이냐시오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찾음(Finding God in all things)”을 강조한다. 그는 그의 영성을 따르는 사람들과 그의 제자들에게 평신도들이 그러한 것처럼 이 세상 안에 머물기를 바란다. 그리고 참된 기도로서 ”그들의 세상 안에서“의 체험을 보도록 한다. 특히 그는 매일의 일상생활 안에서 주님께서 일하고 계심에 보다 민감해질 수 있도록 우리들에게 양심성찰을 강조하고 있다. 이냐시오는 주님과 함께 하며 잠심(潛心)하는 시간을 갖는 즉 어떤 형식을 갖춘 기도를 예수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지속하는데 꼭 필요하다 보았으며, 이에 몇 가지 기도형식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우리가 여기서 강조하여야할 것은 그러한 형식을 갖춘 기도들이 우리의 장터의 삶으로부터 탈출하거나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생의 장터에서 즉 ”모든 것 안에서“ 주님께 민감해질 수 있도록 우리를 돕는다는 것이다.

결론: 성스러움의 참된 계층적 구조

필 자가 “Come down Zacchaeus"의 끝부분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참된 제자의 모델인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 역시 평신도였다. 우리가 좀 더 많은 논의를 한다면 참된 성스러움으로의 부르심이 특정한 사람들에게 주어졌다기보다는 예수를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졌음이 명백해질 것이다. 칼 라너가 말한 것처럼, 참으로 성스럽고 사랑을 실천하며 헌신적인 예수의 제자들은 아마도 우리가 선택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필자 역시 여러 해를 통하여 확신하게 되었다. 우리가 천국에 갔을 때 우리는 평범한 심지어는 전혀 교육조차 받지 않은 사람들이, 어쩌면 세상에서 성인으로 시성된 사람들의 종들이 그리스도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놀랄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결국 예수는 가장 미천한 자가 가장 위대한 자가 되고, 방구석에 있던 사람들이 식탁의 중심에 초대될 것이라는 말씀을 통해 이것을 우리들에게 주지시키고 계신다.

from The Windhover (The Philippine Jesuit Magazine, Vol. 3 No. 3 December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