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손 우배

피정이라 함은 한자 避世靜觀(피세정관)의 준말로 “세상을 피해 고요히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세상 일로 마음이 복잡하고 때론 마음이 세상 욕망으로 가득하여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다거나 우리의 삶과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어렵다. 그러기에 우리는 잠시 세상일과 주변 환경에서 벗어나 조용한 시간을 가지며 마음을 고요 속에 머물게 하여,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며 특히 하느님께서 어떻게 나의 삶과 함께 하시고 지금 내게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교회 내 피정의 역사는 약 450년 전 이냐시오 성인에서부터 시작한다. 물론, 이전에도 교회 내에는 피정 형태의 기도생활이 있었지만, 구체적인 체계를 갖추고 수도자, 성직자는 물론 일반 신자들에게도 보급된 것은 이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냐시오 성인은 회심한 후에 스페인 만레사 동굴에서 개인피정을 하였는데, 그때 성인은 자신의 체험이 다른 이들에게도 도움이 되리라는 확신으로 “영신수련”이라는 피정 안내책자를 쓰기 시작하였고, 또 자신이 체험한 피정 방법으로 다른 이들에게 피정지도를 하였다. 이냐시오 성인은 경우에 따라 (시작하는 날과 끝나는 날을 제외한) 3일, 8일, 30일 피정과 일상생활 중에 하는 피정을 제시하였다. 이렇게 이냐시오 성인에서 비롯된 피정방법은 교회 내 전통이 되었고, 차후 그는 피정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피정에는 개인피정과 강의피정이 있다. 일반적으로 평신도들이 흔히 접하는 피정은 강의피정이다. 즉, 강사가 자신의 기도체험을 이야기하면, 그에 대해 기도하고 생각한 후에, 함께 그 내용을 나누는 것이다. 이는 피정 강사가 전체적인 흐름을 만들고 피정자들을 초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이야기하면 강의피정은 각자의 고유한 체험이라기보다는, 강의하는 사람의 개인체험을 듣고 그 체험에서 내 체험을 끌어내는 주입식 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좋은 책을 한 권 읽는 것과도 같다. 나와 공감 가는 것도 있겠고, 때로는 그 강의를 통해 내 생각을 정리할 수도 있다. 그러기에 강의피정은 타인의 기도내용을 듣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다. 하지만 영신수련과 같은 개인피정은 지도자와 피정자와의 1 대 1 피정으로, 강의 없이 지도자가 주는 기도자료(주로 성경구절)를 피정자가 직접 기도하고 스스로 체험하는 피정이다. 따라서 개인피정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것으로, 피정자들은 각자 다른 자신만의 고유한 체험과 결과를 얻게 된다. 즉, 개인피정은 지금 성령께서 “내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으로, 피정 지도자(동반자)와 함께 성령의 활동을 영신수련 구조에 따라 스스로 체험하게 된다. 따라서 강의피정은 이미 주어진 주제와 안내를 따라 가지만, 개인피정은 미리 주어진 주제와 안내 없이 성령께서 나를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 가기에 종종 개인피정을 통해 우리는 전혀 기대하지 않은 결과를 얻곤 한다. 또한 피정에는 개인피정의 경험이 많은 분들을 대상으로 한 준개인피정이 있다. 이는 기도자료를 여러 사람에게 함께 주고, 각자 자료를 가지고 기도한 후에 지도자와 1 대 1 면담을 하는 것으로, 이는 개인피정의 개념을 확대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피정은 개인피정으로 시작되었지만, 현대에 들어, 점차 사람들이 많아지고, 지도자가 부족해짐으로 해서 강의피정이 일반화 되었다.

이처럼 개인피정은 지도자가 피정자에게 기도자료(성서구절, 좋은 글 등)를 주고, 피정자는 그 기도자료를 가지고 직접 기도하며 자신만의 고유한 하느님 체험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피정자에게 원하는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피정자가 기도하는대로 옆에서 함께 동반하고, 피정자는 자신을 성령의 인도하심에 맡기는 것이다. 피정은 성령과 피정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기에, 만일 지도자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피정자를 이끈다면 그것은 성령의 활동을 지도자가 방해하는 것이다. 영신수련에서도 영적지도자는 성령께서 직접 피정자에게 일하시도록 맡기라고 언급하고 있다.[15] 그러므로 피정자는 매 기도 전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성령께 은총을 청하도록 한다. 피정의 주인은 피정자가 아니라 하느님이시기에, 피정자는 성령께서 자신을 이끄시는 대로 마음을 개방하여야 한다. 즉,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의 마음의 키를 놓아야 한다. 그러기에 피정 중에는 지도자가 주는 기도자료 외에 문득문득 “성령께서 주시는 기도자료”에도 우리는 유념하여야 한다.

따라서 이 때 무엇보다 강조되는 것이 침묵과 잠심(潛心)이다. 일상 중에 우리의 정신은 동적인 리듬에 익숙해져 있어, 피정 초기에는 고요하고 정적인 상황에 적응하기가 힘들고 침묵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다. 우리가 일상에서 하느님의 음성에 귀기우릴 수 없는 것도 바로 복잡한 세상일로 인해 마음이 혼돈스럽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피정을 하면서 의도적으로 침묵 중에 그분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나와 하느님 외에는 아무것도 없도록 한다. 피정 중에는 외적침묵(말을 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디까지나 외적침묵은 내적침묵(잠심, 潛心)을 위한 것이다. 침묵의 이유는 우리의 마음을 고요 속에 머물게 하여, 그분의 말씀에 더욱 귀 기울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세상욕심으로 가득하여 마음이 복잡할 때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일상 중에도 의도적으로 내적침묵의 시간을 갖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다면 이냐시오가 제시한 개인피정인 영신수련이란 무엇인가? 영신수련이란, 양심성찰과 묵상기도, 관상기도와 염경기도 및 침묵 중에 하는 기도를 포함한 모든 영혼활동의 방법들을 말한다. 산보와 걷기, 달리기가 몸의 운동인 것과 같이 우리 영혼이 온갖 무질서한 애착을 없애도록 준비하고 내적 자세를 갖추어,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인생에 있어 하느님의 뜻을 찾고 발견하려는 모든 방법을 말한다.[1] 즉, 우리의 영혼을 훈련하여 성령의 말씀에 보다 민감해지기 위함인 것이다.

우리에게는 육체(body), 정신(mind) 그리고 영혼(spirit)이 있다. 육체를 단련하기 위해 운동을 하고, 정신을 단련하기 위해 명상, 마인드컨트롤과 같은 정신훈련을 하듯이, 우리의 영혼을 훈련하기 위해 영신수련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신훈련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마음을 수련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지만, 우리가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곳은 정신이 아니라 영혼인 것이다. 따라서 영신수련은 명상이나 정신훈련과 구별된다.

영신수련은 하느님께 나 자신을 개방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며, 나 자신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아가며, 그분의 삶을 따르고자 하는 것이다. 특별히 우리는 이냐시오의 관상기도를 통해 예수님을 직접 체험하고 느끼면서 그분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또한 우리는 영신수련을 통해 성령께 귀를 기울여 특별히 “지금, 주님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가?”를 듣게 된다. 이처럼 영신수련은 자신의 기도체험을 통해 성령의 말씀을 듣는 훈련을 하며 그 구조와 방법을 익혀, 일상생활에서도 성령께서 내게 하시는 말씀에 보다 민감해 지도록 훈련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피정자는 피정 중에 피정 지도자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강의피정), 직접 기도를 통해 예수라는 “사람”을 체험하고, 성령께서 지금 내게 하시는 말씀을 듣게 된다.(개인피정) 따라서 이냐시오 성인도 영신수련에서 피정 지도자는 기도할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고 의미를 부연해 주는 것(개인피정)보다 그저 기도자료만 피정하는 이에게 주도록 하고 있다. 만일 기도할 내용을 지도자가 자세히 설명한다면 피정자의 기도가 그 설명에 한정될 수 있으며, 또 영적인 맛과 열매를 더해 주고 우리 영혼을 가득 채우고 만족시키는 것은 많은 것을 머리로 아는데 있지 않고 어떤 것을 내적으로 느끼고 맛 들이는 데에 있기 때문이라고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에서 언급하고 있다.[2] 기도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체험을 통해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다.

피정 후에도 성령께서는 피정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들 일상생활 중에 계속해서 같은 방법으로 활동하신다. 영신수련은 이처럼 늘 우리 생활 중에 활동하시는 성령께 민감해 질 수 있도록 집중적인 시간을 가져, 그동안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을 놓치지 않기 위함이다. 따라서 우리는 피정 후에도 피정 때와 같은 자세로 성령의 활동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활동 중 관상”이요, “활동 중 피정”인 것이다. 영신수련은 우리 일상 중에 늘 활동하시는 성령께 우리의 마음이 민감해져, 일상생활 중에서도 성령께 마음을 열고 그 인도하심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영적훈련인 것이다.

성령의 활동에는 피정과 일상의 삶이 구별되지 않는다. 성령께서는 피정 후에도 우리들 안에서 계속 당신의 작업을 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일상생활 중에 복음 묵상 및 관상, 양심성찰은 물론 “성령께서 주시는 기도자료”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일상생활 중에도 내적침묵이 필요하다. 내안에 혼돈이 있으면 작고 고요한 하느님의 목소리를 우리는 들을 수가 없다. 참 피정의 완성은 피정 중이 아니라 일상생활 중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일상생활을 하면서, 마음 안에 세상일로 가득하여, 내 안에 하느님을 찾아보기 힘들다. 피정 중에는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을 찾았지만, 일상생활을 하면서는 세상일과 근심 그리고 세상 욕망으로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우거나, “주님의 사랑”이 아닌 것들을 즐기기 때문에 그분이 계실 자리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피정 중에 성령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을 훈련하였듯이,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 우리의 피정이 고갈된 영적 갈망을 채우고 다시 일상 삶이나 사도직에 투신하기 위함이라면, 그것은 주유소에서 고갈된 기름을 채우고 세상으로 가 소모하는 영성과도 같다. 하지만 영신수련은 피정 기간 중에 기름을 찾는 방법을 익히어, 세상에서 내 스스로 기름을 찾는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영신수련의 끝은 피정의 “마침”이 아니라 “계속”인 것이다. 책 한 권 읽고 좋은 주제를 가지고 삶의 지표로 삼는 것은 강의피정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하느님의 뜻을 찾는 구조를 익히어 계속 일상의 삶에서 주님의 뜻을 찾는 것이 바로 영신수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을 피정 때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피정을 통해 세상을 하느님의 눈으로 보는 것을 배웠듯이, 우리는 피정이 끝난 후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내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는 여정을 계속하는 것이다.

출처: http://blog.daum.net/joesoh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