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언재 (天何言哉)

  우리는 고전을 읽다보면  옛 사람들의 지혜에 놀랄 때가 있지요.
고전은 우리의 마음을 맑게 하기도 하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기도 하고,
그냥 빙그레 미소 짓게 하기도 하지요.

  논어 ‘양화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공자가 제자 자공과 둘이
산책을 하게 되었나봅니다. 길을 걸으며 문득 혼잣말처럼 공자가 이야기합니다.

  “나는 이제 되도록 말을 하지 말아야 하겠어.”

  그 말을 듣고 자공이 놀라며 말합니다.

  “스승님, 스승님이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저희가 어떻게 배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공자가 자공에게 말합니다.

  “내가 말을 하지 않는다고 그대들이 배울 수 없는 것은 아니라네. 하늘이 언제
무슨 말을 하여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던가? 하늘이 아무 말을 하지 않지만,
때가 되면 나무에 잎이 돋고 푸르러지고 열매가 맺지 않는가? 세상의 온갖 조물들이
각기 제 자리에서 배움을 얻어 각자가 할 일을 알지 않는가? 하늘이 어찌 말을 하는가?”

  논어를 주해한 주자는 자공이 이미 말로서가 아니라 마음으로 깨달음을 얻을 경지에
다다랐기 때문에 공자가 자공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이라고 전해줍니다마는 저는 달리
생각합니다. 물론 각 사람의 배움의 경지나 학문적 수준의 차이를 무시할 수 없겠지만
이 말이 어찌 자공과 같은 높은 경지의 사람에게만 해당되겠습니까? 자공은 특히 언변에
능하고 재기 발랄한 제자였지요. 공자 제자 중에서 공자의 가장 큰 사랑을 받았고 여러 가지
면에서 탁월했던 사람은 안회로 알려져 있습니다마는 천재적인 측면에서는 당연 자공이었지요.
어쩌면 공자는 자공의 언변이 능하고 재기가 반짝이는 것을 경계하여 이 말을 해 준
것인지도 모르지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에게 모든 진리가 말보다는 마음의 눈으로만 비로소
보이는 것은 시공을 초월한 불변의 진리가  아닐까요? 공자는 바로 그것을 이야기한 것이
아닐까요? 공자가 한 이 말, '천하언재'는 우리가 어떤 것을 단순히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야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보고 마음의 귀로 들어야 깨닫게 된다는
의미가 되었지요.

  때로는 제 강론도 그냥 말하지 않고 침묵이 더 나을 때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미사 때 복음을 읽고 아무 말 없이 7-8 분 정도 침묵하고 있다가 다음으로 넘어가고 싶은데,
제가 그렇게 하면 이미 다른 사람들이 행한 것을 흉내 내는 꼴이 되는 터라 그러지도
못하지요. 하하.  불교계에서 무언설법을 행한 고승이 여러 분이 되지요.
가장 긴 무언설법은 만공 스님이 행한 한 시간의 무언설법이 있지만 이름과 연결된 스님은
지월스님이지요.

  “부처님의 참뜻이 무엇입니까?”

  어느 선사가 어느 수행자에게 물었을 때, 수행자는 마치 굳게 닫힌 성문처럼 입을 열지 않고
묵묵히 앉았다가 다만 손가락을 들어 하늘에 떠 있는 달을 가리켰다는 일화가 있고,
지월이란 선사의 명호는 거기에서 연유되었다고 합니다.

  저도 때로 강론 대신 그냥 성경을 가리키고 싶습니다. 때로는 성경 본문을 그냥 마음의
눈으로 읽는 것이 좋은 강론을 듣는 것보다 훨씬 낫지요. 사실 어떤 강론이라고 하더라도
복음의 본문 내용을 마음의 눈으로 읽고 마음의 귀로 듣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의 내용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비유야말로 그 의미를 제대로 깨닫기 위해
마음의 눈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도 그냥 마음의 눈으로 읽으시도록 권해 드리면서
여러분들이 마음의 눈으로 읽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 몇 마디 보탭니다. 그것도 제 말로가
아니라 제 스승이고 영적 지도 신부님이었던 정일우 신부님의 ‘마음의 눈으로 복음 읽기’를
통해서 말입니다.

  정일우 신부님은 이 비유의 핵심 주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따지고 캐묻는 것에는
관심이 없으시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비유에서 농부는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정 신부님은
농부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라고 합니다. 농부가 하는 말을 마음의 귀로
잘 들어보라고 합니다. 종들의 말을 듣고 농부가 말하지요.

  “원수가 그랬구나.”

  종들은 큰일 났다고 흥분하며 “어떻게 할까요?”하면서 걱정하는데 농부는 태연합니다.

  “큰일 날 것 하나도 없다. 가만히 두어라.”

  정 신부님은 이 비유를 알아듣기 위해서 쉽게 ‘벼와 피’로 바꾸어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고학년이 되면 논에 들어가서 피 뽑는 일을 많이 했지요.
거머리 때문에 피를 많이 흘리기도 했고요. 정 신부님은 하느님께서는 벼농사를 지으시는
분이시지 ‘피’봉사 지으시는 분이 아니시라고 합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피는 죄에 해당합니다.
논에 피가 생기게 하는 것, 다시 말해, 우리 삶에 죄를 짓게 만드는 유혹은 원수인 사탄이
하는 짓인데 너무 그것 때문에 연연해하면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일을 망설여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정 신부님은 많은 경우 우리가 쓸데없는 ‘피’농사 짓느라고 정신이 없는데, 그렇게
하지 말고 벼농사 지으라고 하십니다. 생명을 키우는 일에 마음을 쏟으라는 말입니다. 농부가
관심이 있는 것은 낟알, 곡식, 추수할 열매이지요. 때로 피를 뽑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피를
뽑으려다가 벼까지 뽑으면 안 되겠지요.

정 신부님이 재미있는 말씀을 하셨어요. 하느님은 장점을 참 많이 지니셨는데, 그 중에서
잔소리가 없으신 것이 큰 장점이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잔소리를 하지 않으시니
참 편안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잔소리가 너무 많다고 합니다.

  우리도 되도록 말을 줄이고, 마음으로 보는 법을 배우기로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