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NG
제목:영화 '밀양' 피정을 마치고
          
이 글은 피정중에, 밀양을 보시고 난 신부님의 강의를 바탕으로 한 제 생각을 적어 정리한 것입니다.

'밀양'을 관람하고...

7시간의 피정을 마치고 나니 온 몸에 기운이 빠진다. 어깨에 힘을 줘 보지만 자꾸 맥없이 내려온다. 피정을 마치고 이렇게 기운이 빠져보기는 처음이다. 그리 길지도 않은 피정이었는데...생각해보니 그럴만도 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속으로  꾹꾹 눌러두었던 내 고통을 그녀의 고통에 합세시켜 주인공 '신애'를 따라  악을 쓰기도 울음을 참기도 그리고 하느님께 대들기도 하며  함께 용을 쓴 것이다. 더구나 나눔의 시간에 Athens에서 온 두 부부의 피를 토해내는 듯한 고통이 마이크를 타고 쏟아질 때 나도 함께 그 고통속에 있었으니까.

영화 ‘밀양’은 우리나라 여배우가  칸 영화제에서 최초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작품이f다. 나는 이 영화를 두 번이나 보았는데  처음에 볼 때의 감정과 두 번째는 확연히 다르다. 아마 몇 번을 봐도 또 다른 시각으로 보여질 영화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중에는  시청자들에게  마치 자신들이 차려놓은 밥상에 놓인  숫가락을  직접 들어 시청자들에게 먹기를 강요하는 이들이 적지 않는데 나는 그러한 영화를 싫어한다.  관객스스로에게  상상의 자유를  맡기는데 인색한 영화는 나에겐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 . 밀양은 그점에서 나무랄  데가  없다.
영화가 나온지가 한참이나 되어서 이미 영화를 본 이들이 많겠지만  아직 관람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 먼저 밀양의 내용을 아주 간략히 적어본다.
남편을 잃은 주인공  신애(전도연)는  아들 ‘준’과 함께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이사를 온다. 오는 도중 차가  고장나는 바람에   카센터 주인 종찬(송강호)의 도움을 받는데 종찬은 이 인연을 시작으로 언제나  신애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닌다.  그녀는  피아노 학원을 하면서  밀양에서 새 삶을 시작한다. 하지만  어두운 자신의 과거(남편이 바람이 나서 교동사고로 죽음)를 떠나  새로운 삶을 살려는 그녀의 노력도 아랑곳없이  아들'준'이 납치범(아들의 학원원장)에게 살해되는 끔찍한 고통을 맞이한다. 절망의 나락에서 허덕일 때  이웃집 약국여주인의 권유로 간 부흥회에서 그는 하느님을 만나 새로운 삶을 맞이한다. 짧은 시간이었으나 하느님의 사랑에 충만해진 그녀는  길거리  전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죽인 흉악범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를 찾아간다. 그러나 원장이 벌써 신앙인이 되어 하느님의 용서를 받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기쁨에 넘쳐있음에 놀란다. 아들을 잃은 자기가  용서해주지도 않은 흉악범을 하느님이 먼저 용서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이 사랑하는 하느님이 그 흉악범도 구원해줬다는 사실에 경악하면서 그녀는 하느님을 떠난다. 그리고 하느님과 맞서기 시작한다. 하느님에게 자신의 분노를 보여주기 위해  여러가지의  행동으로 자신을 최악의 길로 몰고 가던 신애는 결국 하느님에 대한 복수로 자살을 선택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죽음의  문턱에서 그녀는 "살려주세요"라고 절규한다. 병원에서 나온 신애는  머리를 자르려 미용실을 찾아 가는데 거기서 그 흉악범의 딸을 만난다. 그녀에게 머리를 맡기다  참지 못하고 뛰쳐나온 신애는  나중에 집에서 종찬이 들어주는  거울을 보면서 스스로 머리를 자르는 장면에서 이 영화는 끝이 난다.

  이 영화에서 줄거리는  진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창동 감독은 주인공 신애를 통하여 줄거리보다는 그 상황에 따른  인간의 심리묘사를  아주 섬세하게  표현하는데 촛점을 두었다. 신애역을 맡은 배우 전도연의 연기는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녀의 연기는 이 영화를 보는 관객 각자가 신애가 되어 그 고통속으로 함께 들어가도록 이끌어내는  마력이 있었다. 여우 주연상을 받고도 남음이 있다.
영화의 내용을 좀 더 상세히 들어가 보면,  우선 영화 첫 장면 푸른 하늘이 주는 높이와 차가운 이미지에서 부터 길거리에 고장나 서 있는 차, 극의 초반부터 삶에 별 희망을 기대하지 않는 듯한  권태로운 모습으로  흐느적거리며 내젓는 신애의 팔과 건들거리는 몸... 그런 모습에서 나는 순탄하지 못했던 그녀의 삶을 본다. 그녀가 자신을 버리고 숨진 남편의 고향을 찾아  마치 자신이 남편에게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살아온 여자로 포장하는데 급급하는 모습은 같은 여자로서 슬픔과 연민을 자아내게 한다. 그동안 겪어왔던 삶을 있는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신애는 그녀가 버림받은 여자라는 것을 인정하려들지 않고 도리어 거짓으로 자신의 처지를 포장하며 이웃의 관심을 받으려고 하다 결국 아들을 죽음으로 불러오기까지 한다.
슬픔속에서 하느님을 만나 급속도로 변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나는 그녀가 고통을  벗어나가기 위해 하느님에게로 피신하는 것을 본다. 하지만  그때까지 그가 만난  하느님은 그녀의  탈출도구일 뿐이었다. 그녀가 표현한 "하느님과 꼭 연애하는 느낌"처럼 그녀는 그렇게 자신을 떠나지도 죽지도 않을 전지전능한  하느님이란  탈출구에 자신의 사랑을 다 쏟아 부으며 일시적이나마  행복과 안식을 동시에 얻는다. 그러다가  결국 하느님에게도 상처를 받고  떠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일로 인해 그녀에게 이제껏 가상으로만 존재했던 하느님을 신애는 비로소 실존으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절망상태에 이른 병은 극단적인 처방이 없으면 고칠 수 없다."고 한 세익스피어의 말처럼  역설적이게도 나는 그녀가 죽음으로 향하는 극단적인  행위에서 신애의 새로운 삶을 향한 미래를 본다.  감독은 그녀의  절망속에  희망을 향한 몸부림을 암시하는 장면을 수시로 보여주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슬픈 일이 있을 때마다 그녀를 자주 거리로 내몰아  울부짖게 하는 장면은 특히 그러하다. 그 속에서 나는 슬픔으로 절망하나 항상 사람들속으로 나아가 그들의 시선을 받으려고 하는 의지를 본다. 그 의지는 늘 자신을 다시 일으켜주기를 바라는 도움의 손길을 기대하는 무의식적인 희망을 향한 몸부림처럼 느껴진다.
영화의 마지막에 미용실을 찾아 가는 장면에서는 신애의 심리적인 변화를 읽는다.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영화는 신애를 흉악범의 딸과 만나게 함으로서 그녀의 마음이 이미 용서를 향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나는 그녀에게서 잘려나간  한웅큼 머리카락 만큼의  용서를 본다. 더불어 아무리 애를 써도 도저히 용서가 안되는 아픔도 본다. 하지만 마침내 스스로 머리를 잘라가는 장면에서 나는 '완전한 용서'를 향한 그녀의 의지를 읽는다.  용서는 신앙의 힘으로 도움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결국은 ’본인이 그 고통속으로 철저히 들어가 그 고통에 푹 잠기는 것이라'고 말한 모리교수의 말에 나는  동의한다.
영화에서  극의 마지막 장면은 어떤 장면보다도 희망적이고 따뜻해서 그동안 분노했던 마음을 순화시켜주는데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자른 머리들이 바람에 쓸려가는 곳을 따라간 카메라앵글이 마당 한모퉁이로 고정시킨 곳의 풍경은, 그녀가 앞으로 걸어갈 희망적인 미래를 짐작케 해준다. 그 중에서 신애의 잘려나간 머리카락이  미풍에 쓸려가는 모습에서 나는  고통에서 막 돌아와 거울앞에 선 누님같은 신애를 본다. 또한 역동적인 느낌을 주는 훌라후프와  땅위를  비추이는 따뜻한  햇살,  거울을 들고 신애를 묵묵히 지켜주는 종찬이, 음악… 이 얼마나 완벽한 미래의 삶을 예견해 주는 설정인가.나는 이창동 감독의 치밀한 구상과 주제를 향한  조심스러운 손놀림에 감탄할 뿐이다. 비록 지금 내가 쓴 이 내용들이 그의 의지와 다른 방향으로 갔을지라도 그는 지금 나의 이런 평을 관대하게 봐 줄 크고 너그러운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그만큼 그는 겸손하고도 신중한 화면으로 우리들 각자의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자유로운 상상의 여백을 영화속에 충분히 남겨두었다.
마지막으로 영화의 모든 줄거리를 제한 처음과 마지막 장면을 함께 맞추어 보고자 한다. 흔히들 말하기를 글의 첫페이지와 마지막 페이지를 읽어보면 그글의 내용을 대충 짐작한다고들 한다. 그는 첫 장면에서  하늘을 비추는 그 시간만큼 마지막 장면에서 땅을 비추는데 카메라앵글을 정지시킨다. 아니  마지막 장면에  좀 더 긴 시간을 분배함으로서 "이 영화를 통해 우리가 살아야 할 의미는 하늘이 아니라 땅에서의 삶이라."는 그의 의도를 짐작케한다.
삶 속에서 우리는 원하지 않는 고통과 배반을 숱하게 겪는다. 마치 수렁에 빠진 바퀴처럼 앞으로도 뒤로도 나아갈 수 없는 고통에 빠져 갈팡질팡하는 시간들이 얼마나 자주 있는가. 그렇다고 바퀴를 끄는 나를 무조건  채찍으로 안달을 부린다면 상처밖에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바퀴를 빼내어 앞으로 나아가려면 달리는 것을 멈추고 조용히 내려와  바퀴를 묻고 있는 흙을 삽으로 거둬내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그 마음에 자리한 고통의 흙을 긁어내는데 사용하는 용서의 삽은 각자에게 달려 있을 것이다.  시인은 시로서 달랠 수 있을 것이며 신앙인에게는 각자들의 신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묘한 심리다. 그녀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는 중에 신애의 고통의 강한 물살속에  휩쓸려서 나의   고통이 떠내려간다.   고통도 자기보다 힘이 센  놈앞에서는 비겁하게 스르르 꼬리를 내리는가 보다. 한결 마음이 가볍다.

끝으로 이 글을 맺으면서... 일일 피정을 주관해주신 최신부님과 CLC단원모두에게 감사드리며,아울러 지난 6월 13일 25살먹은 아들을 사고로 잃고 슬피 울던 ATHENS의 형제 자매님께 주님의 자애로우심이 늘 함께 하고 아드님의 영혼이 그분안에서 평안한 안식을 취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찬미 예수
2008년 7월 12일 성당 일일 피정에서 돌아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