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만영 신부님의  글을 예수회 강론 및 단상 에서 퍼왔습니다.


6월 10일 성체성혈 대축일

창세기 14,18-20 / 코린토 11,23-26 / 루까9,11b-17

강론을 준비하기 전에 먼저 제가 이 복음을 통해 영적이득을 얻기 위해 관상을 준비하다 오늘이 교회에서 기념하여 지내는 ‘성체성사 대축일’인데...이 복음은 빵에 대한 것인데 성체성사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하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또한 오늘은 역사적으로 6월10일 민주화항쟁 기념일인데...이와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오늘은 내게 있어 아침부터 무거운 하루였다. 20년 전에 보았던 ‘한열이를 살려내라’라는 걸개그림이 며칠 전부터 보고 싶어 아침 6시에 연세대 도서관에 가서 보았다. 그 그림을 보며 20여년이란 시간과 더불어 많은 것을 하며, 20세기 초 독일 유대인 막스철학자였던 발터 벤야민이 떠올랐다.  

   1940년 발터 벤야민은 자살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역사철학의 개념에 관한 테제들>란 책을 남겨두었다. 이 책안에서 그는 진보란 개념을 그의 9번째 테제에서 Paul Klee의 Angelus Novus란 그림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Paul Klee의 Angelus Novus라는 그림을 인터넷에서 찾아 참조하기 바라며....)

   “클레(Paul Klee)가 그린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라는 불리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의 천사는 마치 자기가 응시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금방이라도 멀어지려고 하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그 천사는 눈을 크게 뜨고 있고, 입은 벌려져 있으며 또 날개는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도 바로 이렇게 보일 것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들 앞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전개되고 있는 바로 그 곳에서 그는, 폐허 위에 또 폐허를 끊임없이 쌓이게 하고 또 이 폐허를 우리들 발 앞에 내팽개치는 단 하나의 파국만을 본다. 천사는 머물고 싶어 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일으키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서 다시 결합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천국으로부터 폭풍이 불어오고 있고 이 폭풍은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세차게 불어오기 때문에 천사는 날개를 더 이상 접을 수도 없다. 이 폭풍은,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 쪽을 향하여 간단없이 그를 떠밀고 있으며, 반면 그의 앞에 쌓이는 폐허의 더미는 하늘까지 치솟고 있다. 우리가 진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폭풍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역사철학 9번 테제: I, 1, 697 f.)

   발터 벤야민은  Angelus Novus란 이 그림을 통해 자신에게 희망과 미래를 역설하고 있다. 다시 말해 ‘역사의 천사’는 사실 발터 벤야민 자신을 투사시킨 것이다. 나치스와 히틀러의 반유태인 탄압이라는 절망의 참담한 현실에 두 눈을 크게 뜨고, 놀라 입을 벌린 천사의 모습이 자신이지만 그 현실을 부정하고 싶지 않고, 그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투쟁하고 싶은 자신의 모습이다. 그 이유는 절망 앞에서도 천국에서 불어오는 폭풍으로 인해 날개를 접을 수 없는 천사, 즉 계속 날개 짓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현실의 폐허 속에 미래를 볼 수 없어 미래에 등을 돌린 자신이지만 미래를 향하게 하는 그 폭풍으로 인해 그는 미래를 향할 수밖에 없는 천사처럼 자신 역시 미래를 꿈꿀 수밖에 없었다. 이 폭풍이 그 에게 있어 ‘진보’라는 이름이지만 희망이란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벤야민은 자살로 자신의 삶을 끝마침으로서 그 스스로가 ‘역사의 천사’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그렇게 찾고 싶었던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먼 곳의 일회적 현현”이라 정의 내렸던 ‘아우라’를 찾지 못했다. 그 자신이 Paul Klee의 원본 그림을 소장하고 있었지만, 그 그림을 통해 ‘아우라’가 드러나는 ‘여기서, 지금’이라는 그 자신을 위한 구원적 명제를 도출해 낼 수 없었다. 역설적이게도 Angelus Novus에서 묘사하고 있는 비대한 천사의 머리처럼, 그 역시 그 자신의 이성적 관념의 감옥에서 벗어 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6월항쟁에 대한 최근의 인터넷 기사에서 '한열이를 살려내라'라는 사진이나 걸개그림을 참조
아래 글을 읽기 바라며....)

   뒷머리가 몹시 아프다, 온몸이 마비되는 느낌이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그의 몸은 자꾸만 축 늘어져 갔다. 그의 동료가 깍지 낀 손이 그의 앞가슴을 꼭 겨 안고 그의 등 뒤에서 그를 부축하고 있다. 그의 왼팔은 ㄱ자로 꺾인 채 허공에 매달려 있는 듯 했다. 그의 왼손은 연신 자신의 허리춤을 부여잡으려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자신의 허리춤을 부여잡지 못했다. 두 다리는 축 늘어져 힘을 줄 수 없어 보이고 안간힘을 다해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두 땅을 딛고 있는 듯 했다.
   그의 얼굴은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흰 목을 다 드러내며 기울어져 있다.  머리에서 흘러내린 붉은 선혈은 그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려 척박한 땅에 떨어졌다. 초점을 잃은 그의 두 눈은 땅을 내려다보고 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그의 초점은 맞추지 못한 눈빛이다. 그 눈빛은 그가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서 남긴 눈길이었다. 그 눈빛은 불의와 절망이 가득 찬 이 땅을 노려보는 눈빛이었으리라. 그렇게 쓰러져 간 그의 모습이었지만 ‘한열이를 살려내라’라는 외침은 신촌, 종로, 시청, 을지로, 서울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죽었다했던 그의 모습이지만, 패배자의 모습인줄 알았지만, 그의 손목의 전자시계조차 멈춰 버린 듯 했지만, 그의 마지막 이 모습은 이 땅에 정의와 민주주의를 앞당기는 활화산이 되었다. 그는 몸과 피는 군사독재를 무너뜨리는 순교의 희생 제물이 되었던 것이다. 6월 뜨거운 태양의 열기와 최류탄은 우리의 분노와 정의에 대한 갈증을 이길 수는 없었다.  이 한 장의 사진에서 뿜어져 나온 아우라는 독재정권에게 최후의 일격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쓰러져 갔던 20년 전의 그의 모습을 오늘아침 백양로에서 다시 보았다.  

  80년대 암울한 상황에서 민주화운동은 바위에 겨란 치기식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계란으로 바위라도 썩어 문드러지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의 죽음과 희생, 흘린 피가 척박한 대지를 적시고 거름이 되어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라는 말처럼 이 땅에 민주주의라는 나무를 자라게 했다. 80년대 당시 외신 기자들은 한국에서 민주주가 이루어지는 것은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를 피우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불가능한 것이라면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학생운동을 주축으로 한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민중들의 염원과 투쟁을 통해 군사독재에게서 항복을 받아내었고, 그간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나마 여러분과 제가 누리고 있는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맛볼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복음은 5천명을 예수님께서 먹이신 이야기이다. 오늘 복음에서 5천명여명의 굶주린 사람들을 바라보는 두 시선을 만나게 된다. 첫 시선은 제자들로 예수께 ‘우리가 있는 곳은 황량한 곳입니다’(루카9,12b),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9,13b)이라 했다. 그들이 본 것은 ‘황량한 곳’, 즉 먹을 것과 잠자리를 구할 수 없는 곳이다.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들이 옳게 보인다. 그들의 판단이 틀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주 합리적이며 논리적이며 정확했다. 그러나 그들이 본 것은 ‘불가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과 벤야민, 계란의 바위치기라고 하던 자들과, 외신기자들의 조롱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극렬 좌경 용공 학생들이라 하던 조.중.동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그러나 두 번째 시선은 “여기서, 지금”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9,13a)라고 하시며 ‘대충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게’(9,14b) 하신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식이다.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꽃을 피기를 바라신다. 그러나 그분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느님께 감사하실 줄 아는 분이셨다. 예수께서 무엇을 보신 것인가? 그분이 본 아우라는 무엇인가? 똑 같은 상황에서 왜 이리 다른 시선과 행동, 판단이 나오는 것인가?
        
  ‘여기서, 지금’ 내게 무엇이 ‘황량 한 곳’인가? 무엇이 불가능함인가? 논리적이며 합리적이며 옳게 보이는 것과 하느님적 판단과 시각이 모순됨을 생각해 보았는가? 내가 찾고 있는 것도 혹시 벤야민의 그것처럼 내 머리를 비정상적으로 비대하게 만든 이성이라는 괴물 속에서만 존재하는 그런 아우라는 아닌가?
  ‘여기서, 지금’ 내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인가? 혹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축복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가?
  이 처럼 성체성사의 신비는 바로 이 ‘황량 한 곳’에서 일어나는 하느님의 신비이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축복의 기도를 드릴 때 일어나는 신비이다. 불가능이 가능으로 실체적 변화가 일어나는 신비이다. 일회적 사건이 구원사적 의미가 되는 영원성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분이 행하셨고, 그분이 세우셨던 성체성사는 바로 그분 그 자체이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