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용 수사님의 글을 예수회 강론 및 단상 에서 퍼왔습니다.

커피와 마늘빵

2006-07-27
작성자 : 김상용  

애석한 일이다. 나의 아지트가 사라진 셈이니...
나는 매 주 수요일, 특별한 일이 없으면 거기엘 갔다. 그곳은 나의 가난을 채워 줄 값싼 커피를 파는 곳. 그러나 결코 궁색함이 없는 그곳에서 나는 커피를 마시며 대략 두 편 정도의 시를 쓰고 마늘빵을 먹었다. 이른 아침의 시간이기 때문에 까페 입구의 통유리 앞을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물결을 보면서 나는 행복해 했었다. 통쾌하게 휴식을 취하는 여유를 가져 본 사람이라면 나의 이 기쁨의 진실을 눈치 챌 수 있으리라. 여름이 가고 나는 어제 그곳엘 갔었다. 그러나 매장은 완전히 다른 인테리어로 고쳐져 있었고 유명 브랜드의 신발가게로 변해 있었다. 너무나 애석한 일이다. 나의 아지트가 사라진 셈이니...

맛 좋은 커피를 사 마실 수 있는 곳이야 얼마든지 널려있겠지만 값이 싸며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곳은 흔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하는 수 없이 편의점에서 캔커피 하나와 가방에 넣어간 마늘빵을 꺼내 근처 동사무소 앞에 마련된 근린공원 벤치에 앉아 아침을 해결했다. 평소에 느끼던 통쾌함 대신 까닭 모를 수치심이 올라왔다.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큰일날 사람처럼 빨리 먹어치웠다. 커피와 마늘빵을. 그리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미난 자신의 취미를 잃어버린 사람은 다른 취미를 찾는다. 그런데 나에게서 다른 취미를 찾기란 퍽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순간 커피와 마늘빵과 그리고 詩는 나의 삶이라는 사실에 최초로 동의하게 되었다. 그때, 의외로 삶과 취미를 분간하지 못하며 거꾸로 살아가는 군상들이 생각났다. 애석한 일이다.

////////////////////////////////////////////////////////////////////////////////
견딜 수 없네

2006-06-20  
작성자 : 김상용  

새로운 학기를 준비하면서 나는 잊지 않고 꼭 연례행사처럼 치르는 일련의 한 예식이 있는데 그것은 반년간 나에게 온 편지들을 정리해서 뜰에 나가 태우는 일이다.

수도자로 살면서 짐이 늘어간다는 것은 매우 서글픈 일인 동시에 불편해 해야하는 일 임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내 자신에 대한 관용의 도가 지나쳐 이제는 솔직히 편한 곳으로 시선이 한 번 더 머물고 있다. 그것이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는 더욱 집요하게 나를 부요하게 만드는 데, 이를테면 어찌어찌하여 알게된 사람들이 내게 보내온 여러장의 편지들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 지 모를 때이다.

나는 오늘 비가 오는 수도원 정원 한쪽 구석켠에서 그간 나를 기억하여 자신들의 어려움이나 혹은 즐거웠던 기억등을 적어 나에게 보내준 여러 편지들을 한 장씩 태웠다. 타 들어가는 편지들이 흰 연기를 자욱하게 남기며 사라져 갔다. 그리고 발신자들의 이름을 한 장 한 장 기억하며 그들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원했다.

예수회원으로서의 삶은 한마디로 '순례자의 삶'이다. 나도 인간인데 어찌 안주하며 머물고 싶은 유혹이 없을까마는 아직까지 나를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나보다 먼저 한 발짝 더 다가와 나를 기다리시는 님에 대한 그리움이다. 타고 남은 재를 떠나 부유하는 흰 연기 속에 담긴 그대들의 삶에 눈이 매워 수줍게 등을 돌린다.

////////////////////////////////////////////////////////////////////////////////

폴락(POLLOCK): 질투심에 시달리는 모든 이들에게 드리는 편지

2006-06-14  
작성자 : 김상용  

   지난 주말, 저는 뉴욕으로 그림 공부를 하러 떠나는 오랜 벗을 만났습니다. 그 친군 강원도 화천 태생으로 파로호가 건너다 보이는 오음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두 살 터울로 그 친구가 저보다 연배가 높지만 그저 편안한 친구입니다. 제가 스무살 때, 무대미술을 전공하던 그 친구를 만났는데 그 당시 그는 화투 패에 그려진 그림을 오브제로 사용하여 오광이 그려진 병풍을 제작하고 있었습니다. 한눈에 보아도 도전과 발악이 스며있는 만만찮은 작가정신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 [옆구리를 발로 채인 소]라는 희곡을 가지고 연극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에게 무대미술을 부탁하러 갔던 길이었습니다. 제기동에 그 친구의 작업실이 있었는데 나의 연극작업이 다 끝나서도 저는 그 친구가 거처하는 그 작업실에 자주 드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친구가 이제 뉴욕으로 가게 되었다며 연락이 왔을 때 저는 그 친구가 떠나기 전에 한번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3년 만에 만났고 그동안 우리 둘은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우선 외적으로는 저는 수도생활을 하는 수도자의 신분이고, 그 친구는 예쁜 아내를 둔 가장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친구의 차를 타고 양평으로 가서 식사를 함께 했는데, 우리가 나누는 대화의 수준이 계속 애매한 외곽만 빙빙 돌면서 변죽만 울릴 뿐 유익함이란 찾아볼 길 없이 피로한 시간이라는 데에 슬금슬금 거부할 수 없는 동의가 일어나자 저도 모르게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화제를 바꾸어 보려고 두주불사(斗酒不辭)였던 유명한 그 친구의 술버릇 얘기를 꺼내 몇번 그 친구 아내를 웃겼지만 대화는 다시 서먹함으로 천천히 돌아가는 순환을 반복 했습니다.

“그래.... 며칠날 떠나는데...?” “17일날 떠난다.” “테러 사건으로 비행기 값 내릴 때라 부담은 적겠구나...”“.........................” “나...그날 공항에는 못나간다. “나올 필요없어.... 이렇게 얼굴 보면 됐지 뭐...”

우리는 양평에서 술 한잔도 하지 않고 맨 정신으로 영화 ‘폴락’에 나오는 잭슨 폴락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아마 그 친구도 시덥지 않은 나의 건조한 발언에 대해 꽤나 어리둥절 했을 거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 친구가 수도원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걸 굳이 우겨서 저는 버스를 타고 화곡동까지 오면서 알 수 없는 분노에 휘말렸습니다. 버스 안에서 구토가 치밀어 올라 내릴까 말까 망설였지만 이미 수중에 여분의 차비가 없는 관계로 이를 악 물고 집에까지 거의 기다시피해서 왔습니다. 저는 너무나 혼동스러워서 깊은 잠에 곯아 떨어졌고 그 다음 날 저는 영적 지도 신부님을 만나 뵈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난 주 저는 신부님을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니까....그저께가 되겠군요. 그 친구가 뉴욕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탑승수속을 밟고 있을 무렵 저는 늘 머리가 혼란스러워질 때면 찾게 되는 서울역 7번 플랫포옴에 있었습니다. 400원짜리 입장권을 끊고 플랫포옴에 들어서면 여러 사람을 만납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 열차의 도착을 알리는 숙달된 장내 아나운서의 비음이 섞인 안내방송소리, 열차의 정비음, 철도! 원들의 호각소리 등 일상에서 접하는 소리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서 늘 저에게 이국적인 소박한 흥분을 가져다 주는 소리입니다. 그곳에서 한참을 있다가 보면 어느 순간에서부터 별다른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게 되는 데 이때, 저는 제 자신에게 중요한 질문들을 던집니다. 가장 잘 정신이 집중되어 있을 때이기 때문이니까요.

저는 그날 그곳에서 4대의 하행선 열차를 차례로 보내고 플랫포옴에서 서성이면서 그날 양평에서 왜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을까를 곰곰히 따져 물었습니다. ‘왜 그랬을까...?’

솔직히...그 친구가 부러운 나머지 참을 수 없는 질투심이 생겨나고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그 친구가 제게 보여준 모습은 적어도 외적으로 보아서는 지금의 제 자신을 상대적으로 매우 초라하게 느끼게 해줄 만큼 당당하고 자신감 있어 보였고 진취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막상 내일 동네 비디오가게 아줌마가 또 연체라며 투덜거리는 잔소리를 걱정해서 오늘밤이 지나기 전에 빌린 비디오 테이프를 반납하기 위해 슬리퍼를 질질 끌며 옆구리에 비디오테이프를 끼고 동네 골목을 어슬렁 거릴 것입니다. 유치한 비교로 치자 하면, 게임이 안되는 얘기죠. 아마도 이 상대적 박탈감 내지는 그 친구에 대한 모종의 질투심이 저를 그토록 분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서울역 7번 플랫포옴에서, 저는 날이 어두워 가고 있음을 알고 무거운 머리를 털어 버리려 긴 숨을 한번 쉬어 봤습니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와 저를 진정시키고 있었습니다. 때론 아무 위로 없이 끝나는 글이 훨씬 더 진실해 보일 수 있다는 생각에 최초로 동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이란 따뜻한 위로를 통해 부유하는 삶의 편린들에 의미를 굳이 부여하기 위해 골몰하는 부자연스러움이 아니라, 매우 현실감있게 현재 내 그릇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버거운 삶의 지혜들을 때론 유보할 줄 아는 용기가 더욱 내게 진실한 까닭입니다. 그래서...한동안 그 친구를 질투하기로 했습니다.

질투는 나의 힘이 될 수 있는 이유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