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충만함을 입은 사람들

2006-07-06 08:13:34, Hit : 409
  
  
  

작성자 : 송봉모  


  "성령에 대한 무지 또는 무시가 있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은 당신 백성들에게 두 가지 위대한 선물을 주었다. 첫 번째는 당신 아드님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요, 두 번째는 성령을 주신 것이다. 하느님이 주신 두 번째 선물은 성령강림 때 주어졌다.

우리는 흔히 예수 이후의 시대를 성령의 시대라 말한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있던 시기는 예수님의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보호해주고, 변호해 주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간 뒤의 시대, 곧 성령의 시대에는 예수님의 성령이 제자들을 보호한다.

그런데 프로메테우스가 하늘에서 불을 훔친 것처럼 오늘날 사탄은 그리스도의 제단에서 성령의 불을 훔치고 있다. 성령의 통치시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성령이 누구인지 모르거나 성령을 소홀하게 대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많은 이들이 성령이 누구인지를 모른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찬미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섬겨 왔지만 성령에 대해서는 무지하기에 무시하고 소홀히 대하였다. 성령께는 아무리 많은 경의를 표시한다 하더라도 지나침이 없는데, 우리는 관심을 별로 주지 않았던 것이다. 어떤 분은 성삼위 하느님 할 때, 성부와 성자와 성모로 아는 사람도 있다.

설령 성령이 누구인지 안다고 해도 계속되는 문제는 그분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 삶에서 성령에게 그다지 열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 번 진지하게 질문해 보자. 우리가 얼마나 성령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있는가? 성령의 바람이 정말로 우리를 활기차게 만들고 교회를 활기차게 만들기를 고대하고 있는가? 성령의 불이 정말로 우리를 불태우고 교회를 불태워 열정 속에서 살아가기를 기도하는가?

능력 있는 신앙생활, 대범한 복음 선포가 개인 차원에서 또 공동체 차원에서 이루어지려면 성령의 인도가 필요하다. 오늘 제1독서에서 증언하듯이 초대교회가 오순절 날 성령 충만함과 함께 복음을 증언한 것은, 오늘날의 우리도 성령이 충만할 때 복음 증언의 사명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것임을 알려준다.

특별히 우리시대 우리나라에서는 성령의 역사가 절실히 필요하다. 대구 지하철 방화 참사사건, 정치적 불안, 하루에 36명꼴로 자살하는 중소기업 사장들, 젊은이 실업문제, 북한의 핵동결문제, 오일쇼크의 위협 속에서, 지금 우리에게는 새로운 열정과 힘을 부어 주실 성령의 활동이 필요하다. 부패한 이 나라와 사람들에 대해서 더 이상 절망하거나 냉소주의에 빠지지 말고 끝까지 희망을 갖기 위해서 성령의 역사가 절실히 필요하다.

성령의 역사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말은 성령 충만함을 입은 사람들이 우리 교회 안에 많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지금 우리는 성령강림 대축일을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념을 통해서 다시 한번 우리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 되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 대해서"

앞서 여러 차례 성령 충만이란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 표현은 루가복음 사가가 쓴 말이다. 이 표현을 사도 바울로 식으로 표현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열매는 구체적으로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착함, 성실, 온유, 절제의 열매를 가리킨다. 가끔 보면 성령강림 대축일을 기념하면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들을 뽑게 한다. 종이 한 장에 열매 하나씩 적어놓고 눈감고 뽑게 하여 그 열매가 올 한 해 우리 안에 열매 맺기를 기도한다. 어떤 사람이 “인내”란 열매가 쓰인 쪽지를 뽑으면 그것이 그가 한 해 동안 키워야 할 성령의 열매라 생각한다. 그런데 바울로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얘기하면서 ‘열매들’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열매를 단수로 썼다. 아홉 가지 열매들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열매는 하나인데 그것이 아홉 개의 다양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을 쉽게 이해하려면 성령이 물질이 아니라 인격체임을 생각하면 된다. 성령님은 인격체이기에 통합된 하나이지 아홉 개의 개체로 분리되는 물건이 아니다.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아홉 가지로 드러나는 성령의 열매를 갖고 살아가게 된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착함, 성실, 온유, 절제 등을 갖고 살아가게 된다.

잠시 신자로서 살아가는 우리 자신 안에서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가 얼마나 드러나는지 점검해보자. 누군가는 지금 풀죽어 고개를 숙이고 있을지 모른다.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 모습 중 몇 개도 발견할 수 없기에 창피해서. 그러한 분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말씀드린다. 바울로 사도는 ‘성령의 열매’라고 말했지 ‘나의 열매’나 ‘신자의 열매’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 점을 유념하고 숙고할 필요가 있다. 왜 ‘나의 열매’나 ‘신자의 열매’라고 말하지 않고 ‘성령의 열매’라고 말했는가?

우리가 우리 힘으로는 사랑을 살아갈 수 없고, 기뻐하며 살 수 없으며, 평화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는 늘 착하게 살 수 없고, 늘 온유할 수 없으며, 늘 절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불가능했던 모든 것들이 가능해진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면 우리가 사랑을 살 수 있게 되고, 평화를 보존할 수 있게 되고, 인내와 온유, 선함과 절제 속에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내 능력에 의한 ‘나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에 의한 ‘성령의 열매’가 열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념할 점이 있다. 우리 안에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맺어지기 위해서는 우리의 수고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씨앗을 뿌리는 작업에서부터 열매를 맺기까지 우리가 성령께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 바울로 사도가 갈라디아서 6장에서 이 점을 잘 설명하고 있다.

“사람은 자기가 씨 뿌린 것을 거두는 법입니다. 그러기에 자기의 육에다 씨 뿌리는 사람은 육에서 부패를 거두겠지만, 영에다 씨 뿌리는 사람은 영에서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입니다”(갈라 6,7-8).

바울로는 지금 업보의 원리를 말하고 있다. 우리가 씨 뿌리는 그대로 열매를 거둔다는 것이다. 여기서 씨앗을 뿌린다는 것은 우리의 구체적인 행위가 성령의 가치기준을 따라 이루어지는 것을 가리킨다. 바울로 말대로, 우리 그리스도인 안에는 육의 자리와 영의 자리가 공존하고 있다. 육의 자리는 육정과 세속을 따라 살도록 우리를 유혹하고, 영의 자리는 진리와 성령을 따라 살도록 초대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두 자리 중에 어느 한 자리에만 씨앗을 뿌릴 수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육에다 씨앗을 뿌리고, 어떤 그리스도인은 영에다 씨앗을 뿌린다. 그 결과 각각 서로 다른 수확을 거두어낸다. 육에다 씨앗을 뿌린 사람이 거두어들이는 것은 부패다. 썩은 것을 거두어들인다. 한편 영에다 씨앗을 뿌린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거두어들인다. 곧 영원한 존재이신 하느님과의 친밀한 나눔을 거두어들인다.

또 한 가지 유념할 점이 있다. 우리 안에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맺어지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열매가 처음부터 나오는 경우는 없다. 식물에 대해 아주 기본적인 지식을 갖고 있어도 자연이 열매를 맺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 것이다. 열매가 나오려면, 먼저 씨앗을 뿌리고, 싹이 트고, 줄기가 자라고, 잎이 나오고, 꽃을 피움으로써 비로소 열매가 이루어진다. 씨앗에서 열매가 되기까지는 많은 수고와 점진적인 과정이 필요하다. 성령은 한 영혼을 새로 태어나게 하는 동시에 그 영혼에 생명을 심지만,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점진적인 과정과 수고가 필요하다.

땅과 함께 수고하는 사람들, 과수원 지기나 농부들은 모두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계절의 순서와 성장의 법칙을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야고보가 말한 대로 “농부는 땅의 귀한 열매를 기다립니다. 가을비와 봄비를 맞아 열매가 익을 때까지 그는 참고 견딥니다.”(5,7)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지는 그 날까지,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인품이 발견되는 그 날까지 인내하며 노력해야 한다.

성화의 점진성을 이렇게 강조함으로써 우리의 계속되는 허물을 너그럽게 봐 주고, 게으름을 장려하자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신자가 되는 그 순간에 성숙한 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비현실적 인식과 그로 인한 절망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p.s. This article from the society of jesus in 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