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성찰은 겸허한 자태다

지원자 청원자 시절부터 양심성찰을 교육 받아 왔다. 대개는 수도회의 규칙을 어떻게 어겼는지 혹 윤리 도덕적 의무 사항은 잘못 한 게 없는지 등을 점검하고, 반성하고, 내일은 고치리라 결심하고, 구체적으로 고쳐 나갈 항목 하나를 정해 두기도 한다. 그리곤 그 점에 대해선 다음 날 성찰 때 특별히 꼼꼼하게 짚어 보며, 더 강도 높은 반성과 결심을 새롭게 한다. 이렇게 하루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다 보면 우린 멋있는 수도자 나아가선 아름다운 인간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허나, 과연 그런가? 결론부터 말하자. 이런 식의 성찰은 우리 영혼을 오히려 위축되게 만들고 병들게 한다. 혹 아름다운 모습을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생명이 없는 조화(造花)에 지나지 않게 된다. 신앙생활의 신비 내지 인간 존재의 신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설명이 끝나 버리고 기껏해야 윤리적 존재에 머물고 말게 된다.

모든 것을 합리적 이성으로 설명해 낼 수 있다고 오만해 지지 말자. 인간 존재나 삶의 모든 국면에 대해 다 납득이 가게끔 정리해 내야 한다고 욕심 부리지 말자. 기본적으로 인간 존재 아니 자연의 존재자들까지 그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신비 앞에 겸허한 자세로 서 있자. 내가 네가 우리가 그리고 우리네 삶이 깊은 신비 덩어리임을 알아듣고 그 앞에서 침묵할 줄 알자.

그리곤 겸손 되이 바라보자. 그 신비체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자, 애정과 경외의 염을 품고서. 함부로 인간의 잣대를 들이밀어 좋니 나쁘니 옳니 그르니 이래야 되니 저래야 되니 하고 재단(裁斷)해 버리지 말자. 그건 폭력이다. 사람과 사물에 대해 더 이상의 폭행을 일삼지 말자.

내 입에 맞고 좋다고 ‘본래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좋은 것이라고 강변하지 말자. 자기 입에 맞는지 여부에 따라 취하고 버리고 하는 것은 철 없는 어린애들 소행이 아닌가. 어린애는 어둠이 그저 단순히 불안과 두려움의 막연한 실체로 다가와 피하고 싶고 싫어할 지 모르지만, 어른은 어둠이 가지고 있는 나름대로의 아름다움과 따뜻함을 알고 받아들이며 좋아하지 않는가.

그저 인간이 세워 놓은 윤리 도덕적 잣대에 따라 스스로를 꾸짖으며 슬픔에 잠기지 말고, 다른 이들을 비난하며 상처 주지 말자. 빛과 어둠이 함께 가고 다 같이 좋은 것처럼 그 모든 것들을 취사선택함이 없이 받아들이자. 어느 하나 예외 없이 그 모든 것은 하느님이 만드셨고 보시기에 좋다고 하셨다. 모습을 띠고 존재하는 것들만이 아니라 마음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들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온갖 마음들의 움직임과 욕망들 또한 하느님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않겠는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혹 이성적 인간들은 반론을 제기하거나 의아해 할지 모른다. 허나 영의 사람들은 이 말이 함축하고 있는 깊은 의미를 알아듣는다.

의식성찰을 한다는 것은 이처럼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 모든 것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어 드러나는 것임을 인정하고 수용한다는 겸손의 자태다. 내 입맛에 좇아 함부로 재단하고 선택하지 않는 모습이다. 합리적 이성의 내 머리로 모든 것을 명확하게 해석하고 판단해 내려는 오만으로부터 물러나, 기본적으로 신비체로서 알아들으려는 몸짓이다.

더 나아가 의식성찰을 한다는 것은 내가 나나 주변을 관찰하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모든 사태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오히려 하느님의 모습과 움직임이 펼쳐지고 드러나는 것을 바라보며 알아차리는 것이다. 하느님 당신이 어떤 몸짓과 소리와 표정과 마음을 엮어 내시는지, 그것이 전체적으로 어떻게 아름다움과 생명을 뿜어내는지를 바라보며 경탄하고 기뻐하고 즐기는 것이다.

아, 의식성찰이 이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를 게을리할 수 있겠는가. 기꺼이 쉼 없이 하지 않겠는가. 의식성찰을 통해 그저 내 못된 성격이나 습관이나 뜯어고치고 망가진 모습을 수선해 내는 것쯤으로 여긴다면, 그 의식성찰이란 건 늘 부담스럽고 께름칙하고 힘들지 않겠는가. 냉엄하게 스스로를 판단하고 칼날 같은 의지력으로 결심을 거듭해야 만이 비로소 자신의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세뇌에 더 이상 젖어있지 말자. 사기다.

그저 바라보자, 아무런 생각 없이 순천만 갯벌 속으로 해 떨어지는 모습 바라보듯. 그러면서 철새마저 날개짓 거둔 채 사위가 고즈넉해진 형언하기 힘든 신비의 순간 속에 들어가 온몸과 머리 헹구고 나오듯, 자신을 보고 이웃을 보고 자연을 보고 일렁이는 물결들을 보자.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본래의 아름다움과 생명을 회복해 낼 것이다. 그리고 이성과 제도와 관습이 빚어 놓은 천박한 현란함으로부터 벗어나 참된 한 줄기 향내를 맡고 맑고 푸른 물 한 모금 마시며 기운을 북돋울 것이다. 아름다운 변화는 이성과 결심과 의지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해가 뜨고 달이 지는 가운데 비가 오고 눈이 내리는 가운데 절로 이뤄진다. 잠듦이 없이 맑게 깨어 보고만 있다면.

*이 글은 까리따스 수녀회 회지 '우물터'(2006년, 봄호)에 게재된 원고 내용입니다.
(유시찬 신부님의 home page에서 퍼온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