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강의하다 엉뚱한 질문을 던지곤 한다. ‘예수님은 아줌마들을 더 좋아하셨겠어요, 아가씨들을 더 좋아하셨겠어요?’ 강의 듣는 이들의 절대다수가 아줌마들이다 보니 깔깔거리며 ‘아줌마요!’ 한다. 내 생각도 그런 것 같다. 예전엔 아가씨들이 아닐까 하고 막연하게나마 생각했는데 요즘 와서 아줌마 쪽으로 확신이 굳어지고 있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3의 성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아줌마. 정말 그렇다. 아줌마성은 남성과 여성을 자신 안에 끌어안으면서 양자를 훌쩍 뛰어넘고 있다. 마치 하느님처럼. 아줌마가 그토록 귀하고 아름답고 좋은 것은 바로 이 점으로부터 출발한다. 거창하게 떠벌리면 존재론적 근거가 여기에 있다.

        아줌마는 남성처럼 강하다. 아니 남성보다 더욱더 강하다. 강한 생명력의 소유자다. 사도들처럼. 사도들 대부분이 뱃사람들이었고, 파도와 씨름하며 생존을 이뤄나가는 강한 생명력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렇게 강하다 보니 현실의 땅 위에 굳건히 뿌리 내릴 줄 안다. 허공에 뜬, 현실성을 잃은 낭만주의에 젖어 있으려고 하지 않는다. 구체적이고 실리적이지,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놀음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줌마는 내숭 떨지 않는다. 솔직담백하다.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다. 그러다 보니 사물을 정확하게 볼 줄 안다. 겉발림으로 치장하려 하지 않고, 이상적 낭만성에 떨어져 왜곡시켜 바라보지 않는다. 살만큼 살면서 삶의 굴곡들을 볼 만큼 봤다. 번지르르한 학력과 재력을 갖춘 외모 뒤에 숨어 있는 추잡한 모습도 봤고, 술주정이나 해대는 무지렁이 같은 사람 속에 숨어있는 따뜻한 손길도 느껴봤다. 자연히 가슴 품이 넓어졌다. 이놈도 나름대로 괜찮고 저놈도 나름대로 괜찮다. 함께 어우러져 갈 따름이다.

        무엇보다 아줌마는 창조주다. 하느님을 빼다 박았다. 생명을 낳는 것부터 시작해서 가정을 낳고 음식을 낳고 아름다움을 낳고 자연을 낳는다. 생명의 근원지다. 아가씨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도록 순수하지 않다. 그렇다고 자포자기한 가운데 거리에 나앉아 있는 것도 아니다. 적당히 깨끗하고 적당히 더럽다. 음양이 적절히 섞였고, 남성여성이 혼융되어 있다. 여기야말로 생명이 탄생하는 최적지가 아닌가. 물이 너무 깨끗하면 고기가 못 산다고 지혜로운 어른들이 말하는 것도 이 의미다.

        생명을 낳고 기르는 이 창조의 모습이야말로 하느님을 닮은 우리가 도달해야 할 궁극점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루가10,38~42)에서 마르타를 꾸짖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로하신다. 마리아도 내 발치에서 내 영성을 귀담아 듣고 배우게 되면 너처럼 온갖 것들을 창조하고 생산해낼 터이니 그때까진 좀 참고 기다리라고.

        예수님은 ‘사마리아 아줌마’를 정말 좋아하셨다. 남편을 여섯이나 갈아대며 살고 있는,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거침이 없는, 그러면서 솔직하고 꾸밈이 없는 이 아줌마에게 어느 누구에게도 가르쳐 주신 적이 없는, 당신이 메시아라는 신원을 가르쳐 주실 정도로.

        이 아줌마성 안에 엄마가 좌정하고 있고 누나가 숨 쉬고 있다. 내 생명의 탯줄이 거기에 가 닿아 있다. 아줌마성의 양분을 받아먹으며 내가 자랐고, 그 생명력을 이어받았다. 이 아줌마성의 품에 안겨 가식의 옷들을 벗을 수 있었고, 팽팽하게 당겨진 신경줄을 놓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하느님, 아줌마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