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삼수련...구신부님글...

 제삼수련(第三修鍊)

 

 저는 제삼수련을 위해 나가사키長崎 에도착하였습니다.

제삼수련이란 예수회의 특수한 제도로서 수도 생활의 연 륜이 어느 정도 쌓인 회원들이 받게 되는 최종적인 양성 단계입니다. 제삼수련을 통해서 예수회원들은 자기들의 소명과 신앙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심화하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제삼수련 참가자들이 지난주부터 이곳 나가사키 시의 다테야마立山에 자리잡고 있는 예수회 피정집에 속속들이 도착하였습니다. 참가자 12명은 일본을 비롯하여 8개국에서 모여 왔습니다. 우리는 올해와 내년과 내후년 등 3개년에 걸쳐,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기도하고 쉬고 공부하면서 함께 수련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삼수련반의 반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반장은 연락사항을 알리거나 계획을 짜거나 회의를 할 때 사회를 보며 수련장과 수련생들을 사이를 중개하게 됩니다. 우리들을 지도하기 위해서 노만 신부님이 수련장으로 파견되셨습니다. 노만 신부님은 올해 연세가 일흔일곱 이 되신 미국 신부님으로 중국과 대만 등지에서 오랫동 안 선교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금복주’라고 하는 소주 에(한국에 지금도 금복주 소주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오는 할아버지 처럼 생기셔서 ‘에비수 영감님’친밀감을주고 있음)(‘에비수’는 중국에서 전래되어 일본에 정착된 민간 신앙으로 복을 가져다주는 7신중의 하나. 농경과 어업을 관장하는 신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친밀감을 주고 있음) 이라는 별명을 붙여 드렸습니다.

 

술은 전혀 못하시지만 생김새 만큼은 금보주 할아버 지를 닮았습니다. 중국이 공산화되었을 때 구금 생활에 고문을 겪으셔서 지금도 다리를 저십니다. 우리들은 수련생들이기는 하지만 나이가 40대에서 50대이므로 이미 중견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제로 서품된 지도 대부분 10년 가까이 되었고, 교회나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한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일랜드 사람인 월폴 신부는 필리핀 민다나오의 밀림에서 원주민을 위한 교육과 관개 시설을 위해 오랫 동안 일했습니다. 그는 영화 <미션>에 나오는 주인공인 가브리엘 신부처럼 수염이 덥수룩하고 깊은 눈을 지녔 습니다.

 

마이크로네시아에서 온 환 신부는 마샬 아일랜드라고 하는 작은 섬에 있는 중학교의 교감 선생님입니다. 생김새가 시골의 아저씨 같은 환 신부의 얼굴에는 그가 가르치는 바닷가 학생들의 순수하고 꾸밈없는 모습 들이 묻어나 있습니다. 베트남 사람인 민욱신부는 오스트 레일리아 관구에 속해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 때는 베트콩에 포로로 붙잡혀서 최전선에 총알 받이로 배치되었었고 나중에는 보트피플로 탈출하였습니다. 민욱 신부는 형 같습니다. 이름도 얼굴도 정서도 한국 사람과 비슷합니다.

 

그의 웃는 얼굴을 대하면 그가 살아내야만 했던 시대의 아픔과, 생사 를,넘나들며 걸어왔던 험난했던 길이 선하게 느껴집니다. 미국에서 온 다니엘 신부는 나이가 가장 어립니다. 한국 음식 을 좋아하고 한들을 금방 깨우쳤습니다. 저만 보면 그 어눌한 미국식 발음로, “나는 댄 신부입니다. 미남입니다.”하면서 재롱을 떨고 있습니다. 크리스토퍼 신부는 말레이시아 사람 입니다. 음악을 전공하였고 지금은 쿠알라룸푸르의 대학에서 일하고 있는데 특히 청소년 사도직에 관심이 많습니다. 베다 신부는 인도네시아 사람으로 태국에서 선교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과묵하고 따뜻한 베다 신부는 그곳에서 신학생 양성 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오사무修一,마사시正志,이치로,신조,히토 시仁 신부 등은 도쿄의 죠치 대학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동료들로서 일본 사람들입니다.

 

 

  저는 중년으로 접어드는 삶의 기로에 이런 휴식과 성찰의 기간이 주어진 것에 대해서 깊은 감사를 느낍니다. 이제 앞 으로 두 달간, 침묵 속에서 기도와 휴식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십수년간 계속 해서 앞만 보고 달려온 길이었습니다. 여우를 가지고 천천 히 되돌아볼 겨를이 없을 만큼 바쁘고 정신없이 살아왔던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수련을 시작한지 이제 일주일, 기도하려고 성체 앞에 앉으면 지난 20년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제가 이 수도의 길을 걸으며 만나고 헤어졌던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청운의 꿈을 품고 수원의 수련원에 함께 입회하였던 13명의 동기들, 길러 주시고 세상으로 보내기까지 끊이지 않는 기도로 성원해 주셨던 부모님, 엄하시지만 속이 따뜻하셨던 요셉 수련장 신부님, 용산의 막달레나 집에서 함께 아이들을 가르쳤던 비비아나와 신디케츠선생님, 89년의 여름에 은혜로운 기도 체험을 이끌어 주었던 부산의 ‘은혜의 집’ 수녀님들, “살아가면 갈수록 쌓이는 것은 죄뿐입니다.

 

하늘에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하느님 앞에 어떻게 서야 할지 두렵기만 할 뿐이다”라면서 늘 용기를 주셨던 마리아 할머니, 학자와 수도자로서의 모범을 보여 주셨던 니콜라스 신부님과 젤피 신부님, 그리고 일본과 미국에서 만났던 수많은 은인들... 이분들중에는 벌써 하느님 품으로 돌아간 분도 계시고 소식이 끊긴 분들도 있지만 저의 마음 속에서는 한 번도 잊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매미들이 신나게 노래 부르는 동안 나가사키의 여름 오후가 느리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멀리 내다보이는 항구에서 배들의 고동 소리가 들리고, 하늘에서는 구름들이 심심하게 지나다 닙니다. 저는 지난 세월 동안 만나고 헤어졌던 많은 분들의 이름을 한 사람씩 천천히 불러 봅니다. 제 삶을 은총의 이 야기로 엮어 주셨던 분들입니다.

 

일본상지대신학부교수/구정모신부

착한이웃/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