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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 즉 길을 따라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이냐시오 성인은 만레사에서 자신을 봉헌하고 하느님께 약속을 드리기위해 수련을 해 나갑니다. 내면에 깊이 들어가 여러가지 유혹들에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훈련을 계속 해나갑니다. 우리도 이 피정에서 그와 같은 정신을 따라가야 할것이라 봅니다.

우리도 스스로 세워놓은 시간 계획표를 잘 관리 하고 따라감으로서 내마음이 흩으러지지 않도록 애쓰고, 영신수련 전체의 흐름와 움직임에 함께 율동을 맞추듯 따라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가는것은 하느님께 떨어져 있는 마음거리를 재조정하는 작업입니다. 그것은 충실함으로 밖에는 해결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교회로부터 떨어지지 않은 존재임을 안다면 합리적으로 영원한 길로 초대받는 것임을 알아야 하며, 늘 어느정도 하느님과 내가 멀어져있는지 경계하며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유혹들에 시달리지요. 잡념과 피곤함 등으로요.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하나씩 하나씩 순서있게 나아가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억지로 이겨내려는 마음보다는 차분하게 한걸음씩 해나간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실 쉽지는 않은 일이죠.

그러나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십시오. 과연 죄란 어디에서 왔는가? 긍정적인 측면으로 살아왔는가? 하고.  성경을 보면 부정적 역사의 절정에서 죄들이 생겨났습니다. 카인과 아벨의 역사가 그렇고,  아담과 이브의 역사를 봐도 그렇습니다. 나의 역사는 어떠했는가도 과거와 현재를 되돌아보며 한번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듯 부정적인 마음이 지배적일때 죄가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는것입니다. 우리가 유혹에 시달릴때도 그점을 유의하시면 좋을듯 합니다.

가끔 우리는 우리의 유혹과 죄, 혹은 부정적인 느낌에 시달리며, 하느님이 정말 계시는가? 라는 질문을 자주 던지곤 하지요. 저 역시 함께 공동체에 계셨던 이상철 엘리야 신부님이 병으로 고통스런 모습을 보이실때나, 어느 자매님이 병으로 고통받던 어머니를 간호하다 어머니 대신 먼저 돌아가실때를 목격하면서 목놓아 우시는 어머니를 뵈며 정말 고통중에 하느님이 계시다고 믿을수 있는 강인한 믿음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하면서도 힘든일인가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철학자 니이체는 ‘신은 죽었다.’ 라고 표현했습니다. 세상의 부조리들을 통해.  가령 나치 통치하에 유태인들이  죽음의 순서를 기다리며 가스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래도 하느님 제발 제 옆에 계셔주십시오. 어려움을 해결 해 주세요. 불의와 불공정함을 심판해 주십시오.” 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역설절인 표현으로 ‘하느님은 없다’ 라고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전 과달루페 성지를 순례하고 왔습니다. 그곳에 갔을때, 발라데로르 니냐 라는 곳을 방문했었는데 이곳은 4000면 가량의 아이들이 있는 학교 입니다. 부모들에 의해 버려졌거나 낙태 허용이 안되는 멕시코에서 십대 미혼모들이 낳은 아이들나 형편상 양육되기 힘든 아이들이 모여 있다고 합니다. 기원은 소 알로이시오 신부님이 한국전쟁 고아들을 데려다 키우고 입히고 먹이며 교육을 시키셨던 역사에서 유래해서 그것이 필리핀 멕시코 등 세계 각지로 펴져 나가있다고 합니다.

어쨌든 그곳에서 아이들이, 방문했던 저희들에게 노래를 들려주는것을 듣고 왔습니다. 그때 심정이란 버림받은 아이들이 누군가 남을 위로해주는 일을 기꺼이 한다는것 그리고 공부하고 일하면서 긍적적인 자기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는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과달루페의 성모님이 그 아이들의 마음안에 살아계심을 절실히 느꼈던 것입니다. 그 노래는 단지 어디서나 들을수 있는 노래가 아니였습니다. 성지의 아름다움이나 거창한 기적의 모습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직접 만난 작은 성인들을 통해서 진실된 성모님의 모습을 볼수 있었지요.

9.11 사태나 Tsunami재해등의 어마어마한 참사들과 재해 앞에서 하느님이 계시는가 하고 반문하면서 계속 울부짓는 모습. 우리들의 한계에서 오는 매달림이라고 할수 있겠죠. 그러나 그 모습은 바로 하느님! 제발 계셔주십시오. 저희가 할수 있는 일이 너무 미약합니다. 도와주십시오.! 하고 소리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간절한 부르짖음이지요. 나 자신이 부정함으로서 하느님이 계셔주심을 갈망하는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영신수련을 하면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나의 삶안에서 어려움과 부정의 시간 속에 함께 투쟁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발겨하게 됩니다. 저는 많은 이들과 영적대화나 고백성사를 통해 우리 삶이 내가 아닌 누군가의 이끌림임을 깨닫고 고백하며, 토로하는 힘있는 긍정을 느끼고 그들 가슴속의 진정한 말들을 자주 듣습니다.

지금까지 나도 모르게 살아온 삶 가운데 하느님은 끊임없이 내 안에 함께 해주셨다는 믿음이 샘솟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미 많이 들어보신 얘기일 겁니다만 인디안 전통안에는 꼬마들이 크면 담력과 확신을 키워주기 위해 추장이 아이들을 데리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갑니다. 밀려오는 공포에 밤새도록 지새우는 아이들은 새벽녘이 밝아오면서 뜬눈으로 새던 분으로 자기 아버지가 바로 자기가 기대었던 나무뒤에 숨어서 함께 밤을 지새우며 지켜보고 있었던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어떤 상황 속 에서도 나를 지켜주신다는것입니다.

기도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멀리계시다는 느낌들을 넘어서, 내가 힘들고 어려울때조차  옆에 계셔주실 거라는 믿음을 지녀야 합니다. 끊임 없이 빗나가려 하는 인간의 역사안에서 조금씩 고통중에 영혼이 구제되도록 이끄시는 그분의 손길을 느끼는 것은 우리에게 희망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신비신학을 대표하는 쟝 다니엘 신부님은 ‘영혼에 가까울 수록 어둠이 짙다’ 라고 표현 하셨습니다. 캄캄한 어둠안 일수록 별빛이 더욱 초롱초롱 빛나게 되죠. 고통중에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지만 그것은 극명한 사실입니다. 고통중에 우리는 빛나는 것들을 더욱 확연히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고통중에 자세는 ‘내 마음의 지향이 무엇을 감지하려고 하는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침묵을 지켜나가는 이유는 일상의 소음으로 부터 내적 소리를 듣도록 안내되는 것이며 침잠을 위해 내 안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선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소용돌이 후에 맞는 고요와 정결함은 맑은 하늘, 햇살 등과 같이 생명을 발하는 모습으로 나타나 보일것이며 궁극적 희망의 빛으로 힘과 용기를 갖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되풀이 말씀드리지만 시간관리를 잘 하시기 바랍니다. 쉬는 시간, 기도하는 시간등을 잘 조정하세요. 영신수련은 원리와 기초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것을 이해하고 마음으로 받아 소화해 낸다면 수련의 기초를 단단하게 다지게 됩니다. 내삶의 틀이 흔들리지 않도록 해주며 삶에서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내 인생의 원리와 기초를 음미하면서 나간다면 흔들림없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것입니다.

영신수련 첫째주간

23, 원리와 기초
    사람은 우리 주 천주를 찬미하고 공경하고 그분께 봉사하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조성된 것이다. 그 외에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사람을 위하여, 즉 사람이 조성된 목적을 달성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하여 창조된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사물이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면 그만큼 그것을 이용할 것이고, 또 방해가 되면 그만큼 배척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물에 대해서, 만일 그것이 우리 자유에 맡겨졌고 금지되지 않았으면, 중용을 지녀야 할 것이니, 즉 우리는 질병보다 건강을, 빈곤보다 부귀를, 업신여김보다 명예를, 단명보다 장수함을 원하지 않을 것이요, 따라서 모든 다른것에서도, 우리는 오로지 우리 자신을 최고 목적으로 더욱더 인도하는 사물만을 원하고 선택해야 한다.

시간표를 작성한것을 최선을 다해 매일 실천하도록 하십시오. 침묵을 잘 지키는 것 , 외출의 유혹을  이겨내는 것들은 짧은 4박5일간 꼭 지켜내야 하는 사항들입니다. 리듬에 맞추어 잘 따라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상에 가셔도 그 리듬을 기억하고 담는 방법으로 유도하시길 바랍니다. 항상 우리는 많은 것들, 복잡한 것들을 원하지만 실상은 간장한것 안에 단순함 안에 모든 진리가 들어있음을 기억하세요. 간단하고 단순한것 작은것을 바라고 현실적인 목표를 지향하는것이 이 피정에서 필요할 것입니다.

앞으로도 매일 20분내지 30분 기도시간을 가지시길 권합니다. 그것이 영신수련을 내 삶에서 계속적으로 지속시키는 밑바탕이 될것입니다. 내 삶의 패턴을 살피고 개선의 여지가 있는지 항상 기도속에서 살펴보는 것은 참으로 긴요하다고 보겠습니다. 이냐시오 영신수련에 있어서 양심성찰 혹은 의식성찰은 참 중요합니다. 잠들기전에  나의 삶을 잠시라도 반성해 보는 시간을 마련하도록 하세요.

기도란 하루는 보내고 자기전에 하느님 앞에 앉어 십자성호를 긋고 하루를 보내주는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과 대화를 하는것입니다. 방법은 묵상과 관상방법을 사용하시구요. 위에서도 언급했던 영신수련의 기도법 의식성찰이나 양심성찰과 같은 기도의 틀을 지키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자연적인 감으로 넘어가 굳이 틀을 고집하지 않게 되지요. 그런 순간이 올때까지는 정식적인 틀을 따라가도록 하십시오.

기도를 하고 싶어도 바쁜 일상에 시달리는 우리는 시간이 없어서 못한다는 핑계를 댑니다. 그것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 태도의 문제입니다. 마음을 모으면 어떤 상황 어느시간이라도 일상안에서 기도시간을 만들수 있게 됩니다. 기도시간을 미루거나 지체하지 마세요. 기도를 이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도가 끊어지지 않고 삶으로 이어지는 것은 우리 영혼을 키워주는 원동력이 됩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몇가지 당부드리고 싶은것은, 바라는 원의를 잘 세우시라는 것입니다. 이 피정의 궁극적인 원의를 잘 파악하시는것, 시간표 작성대로 잘 실천해 나가는것, 봉사자 Program 을 잘 준수할것, 공동체 한 물결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않도록 피정의 리듬을 잘 타고 나갈것, 그리고 아울러 한가지 첨부하고 싶은 권고는 지금까지 하던 기도장소에서 공개장소로 한번 기도장소를 이동해 보시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군요. 다른 느낌과 기도의 영향을 받게 되겠지요. 시도해 보고 싶은신 분들은 한번 해보도록 하세요.

다음은 오늘 내 드리는 기도 독서 내용입니다.

마태오 복음 3장에서 13절 부터 17절까지
                 4장에서 1절 부터 11절 까지
루가 복음 5장에서 1절 부터 11절까지
마태오 복음 16장에서 24절부터 25절까지
마태오 복음 20장에서 29절부터 34절까지
요한 복음 13장에서 1절부터 20절 까지 – 이 복음은 모두가 공통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저녁에 주무시기전에는 요한 복음 13장 36절에서 38절까지를 읽고 묵상하며 주무시구요 오늘미사 독서와 복음, 그리고 환호성을 봉독하며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