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Oct. 16th  2:30 PM
한국 순교 복자 수녀원
16272 California Ave. Bellflower, Ca. 90706

참석자 : 최 영민 베드로 신부님
강 이시드로 형제, 김 베드로 형제, 김 리디아 자매, 김 심포로사 자매, 김 안나 자매, 김 은옥      크리스틴 자매, 김 파스칼 형제, 서 마리아 자매, 심 엘레나 자매, 전 도미니꼬 형제, 정 도로테아 자매, 정 로사 자매, 정 릿다 자매, 정 바오로 형제, 정 세실리아 자매, 양 요안나 자매, 이 모니까 자매, 최 베로니까 자매, 최 아우렐리아 자매, 허 엘리사벳 자매.

최 영민 신부님 : 여러 분 반갑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체 되었으니 강의는 한꼭지만 하기로 하고 기도 한번 하고 미사를 하는 것으로 진행 하도록 하지요. 이냐시안들이 모임을 가질 때에는 먼저 자신에 대해 소개를 하기 때문에 먼저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저는 최 영민 신부이고 한국 예수회 소속 입니다. 제가 예수회에서 양성 받은 것은 communication ministry 였는데 사제가 된 후에는 영화에 대하여 공부하였습니다. Hollywood가 있어서 이곳으로 왔는데 현재 본당에 묶여 있고 미주 가톨릭 방송을 맡고 있습니다. 여러 분들 중에 미주 가톨릭 방송을 듣고 계시는분 있으십니까? Radio Seoul에서는 토요일 밤 9시에서 10시 사이에. 그리고 Radio Korea에서는 일요일 아침 7시에서 7시 반까지 하고 있는데 reception은 별로 좋은 것 같지 않습니다. 이번에LA지역에 가톨릭 위성 TV 방송을 세우려고 시도 하였었는데 아직까지 이곳에서는 media 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것 같고 관심도 없는 것 같아서 추진하다가 중단 되었습니다. 다른 교회들, 불교나 개신교회에서는 활발하게 media를 이용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이곳에 있는 우리들의 교회는 media 매체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직 방송을 띄울 역량이 안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 회원의 한 사람으로써 CLC회원인 여러 분들을 만나 뵙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그동안 김성호 신부님께서 이곳에 씨를 뿌리시고 열심히 이끌어 주셨는데 모든 것은 하느님의 섭리로 이루어 지는 것인 만큼 앞으로도 여러 분들이 미주 가톨릭 교회 안에서 CLC의 밑거름이 되어 주시기를 부탁 드리고 싶습니다. 선한 지향으로 나간다면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서 다 이루어 질 것이라고 생각 됩니다. 오늘 부탁 받은 것은 그동안 CLC안에서 조금 복잡했던 일들 – 인간들이 모인 단체이므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을 수가 있고 그 와중에 서로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되는데, 서로 화해 할 수 있고 용서 할 수 있도록 “용서와 화해”라는 주제를 가지고 풀어 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용서와 화해”에 대하여 기도 할 수 있는 묵상 자료를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이것으로 제 소개를 마치도록하고 한쪽으로 돌아 가면서 각자 자기 자신에 대하여 소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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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오늘 기도하실 성서 귀절을 드리겠습니다. 요한 복음 20장 19 – 23 절과 21장 1 -14 절 입니다. 자 한번 읽어 드리도록 하지요…………………………………………………………………................
여기에 나오는 중요한 두 단어가 “용서”와 “성령” 입니다.  요한 복음 20장의 말씀을 살펴 보면, 예수께서 부활 하신 다음 다락 방에서 모여서 무서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나타나셔서 “샬롬”하고 인사를 하신 후에 바로 행동하신 것이 “숨”을 불어 넣으시면서 “성령을 받아라” 그리고 나서 이어지는 말씀이 “용서”에 대한 것 입니다.
“용서”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인간 삶의 형태 안에서 우리들은 알게 모르게 상처를 주고 받게 됩니다. 작은 것들은 쉽게 용서 할 수도 있고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용서 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용서 할 수 없는 사안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자기 자식을 죽인 사람을 용서 할 수 있겠는가? 언젠가 정신이 이상한 사람 하나가 자동차로 여의도 광장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을 여럿 죽인 사건이 있었는데 그 때 아이를 잃은 어느 엄마가 그 사람을 용서 한다고 말하여 신문에 크게 났던 적이 있습니다. 자기 자식을 죽인 사람을 용서 한다는 것은엄청난 것이지요.
내 마음 안에 큰 상처가 있는데 그 상처를 만들어 준 사람을 용서 하기는 힘든 일 입니다. 어쩌면 “용서”는 인간으로서는 불 가능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용서해 주라”고 하시기 전에 어떻게 하셨습니까? “숨”을 불어 넣으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 한다”는 것이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 - 하느님이 도움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 하기 때문에 “용서”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인간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었을까요?  상처는 어딘가가 고장난 것이라고 할 때, 상처 받은 인간은 고장난 물건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고장 난 물건은 고쳐야지 다시 쓸 수가 있는데 그러면 어디로 가서 고쳐야 제일 잘 고쳐질까요? Repair shop보다도 그 물건을 만든 회사에 직접 가지고 가면 제일 잘 고쳐 주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인간 존재가 고장이 나면 하느님께로 가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기본 적인 idea 입니다. 고치러 갈 때 그냥 무조건 가지고 가지 말고 어디가 고장 났다는 것을 알려 주면 시간을 절약 할 수가 있겠지요. 우리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러 분들이 아퍼서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어디 좀 보자”고 하시지요. 서양 의학에서는 먼저 보아야 고칩니다. 보고 나서 튀어 나온 부분은 잘라 내고 구멍이 난 부분은 메꿉니다. 보아야지만 무엇인가 대처 할 수 있기 때문에 고칠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잘 살펴 보면 서양 의학의 발달은 lens의 발달과 맞 물려 발달하여 왔습니다. X-Ray나 CT 촬영, MRI, 내시경, 피검사 – 피 검사도 결국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는 것이니 이게 모두 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전자 기술, 또는 lens를 통해서 보려고 합니다. 잘 안보이니까 어디 잘 좀 보자 – 그런데 이럴 때의 문제는 안 보이면 모른다는 것 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사용 하는 말에 “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기분이 좋다, 안 좋다, 기운이 난다, 떨어진다, 등등등….. 유독 우리 말에는 “기”가 들어 가는 단어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운, 기의 흐름……….피는 혈관을 타고 흐릅니다. 그렇다면 “기”는 우리들 몸 안에서  어디를 통해  흐를까요? ……….. “기”는 근육과 근육 사이 사이의 빈 공간으로 흐릅니다. 빈 공간이니까 안 보이는 것이고 현대 서양 의학에서는 안 보이니까 모른다는 것이지요. 검증이 될 수가 없습니다. 4600년 전에 쓰여진 “황제 내경”에 이미 “음양 5행”이라던가 인간의 체질등에 대하여 적혀 있는데 겨우 몇 백년의 역사를 가진 lens의 발달과 함께 한 서양의학에서 이렇게 긴 역사를 가지 동양 의학을 인정 할 수 없다는 것은 어딘가 말이 안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지음은 서양 의학에서도 “기”에 대한 공부를 하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본다”라는 단어에서 조금 이야기가 엇 나갔습니다. 다시 우리들의 주제로 돌아 와 우리 인간의 존재를 보기로하지요. 보는데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느님께서 우리들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의 눈으로 보자는 것 입니다. 이렇게 교회 안에서 보는것은 신학적인 입장에서 보자는 것인데 신학적으로 본다는 것은 성서에 근거하여 보는 것을 의미 합니다.

(1)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성서에 의하면 우리들 인간은 창조되었습니다. 어떻게 창조되었나?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과 비슷한 존재로 창조 되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한번 철학적으로 보기로 하지요. 철학적으로 본다는것은 인간으로써 생각을 할 수 있는데까지 해 보자는 것 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살펴 볼 때는 당연히 이런 의문이 제기됩니다. 하느님 – 그 완전하신 분이 인간을 왜 요 모양으로 밖에 못 만드셨을까? 그 높으신 존재가 당신 모상대로 창조 했다는 인간이 왜 요 모양 요꼴 인가?
인간이 가진 한계 – 이것이 바로 완전함과 불완전함의 차이 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가진 불완전함의 가장 극명한 이유는 무엇 일까요? 그렇지요. 죽음!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입니다. 불 완전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 입니다.
“불 완전”이란 단어를 한번 쪼개어 보지요. “不” – 완전의 반대말 입니다.  “完全” – 하느님의 모상 대로 창조 되었으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닮은 그 만큼을 의미 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불완전하기도 하지만 완전성도 부여 받았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 완전성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지고 지순한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는 의미지요. 인간이란 무엇인가 가치 있는 것을 찾고 있는 존재라는 것 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완전성”을 갖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물건 하나를 사도 어느 것이 더 완전한가 비교해 보고 나서 사지 않습니까? 완전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비교하는 것 입니다.  우리들은 불 완전하기 때문에 영적으로 더 완전한 것을 추구 합니다.

(2)        인간은 공동체성을 갖고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하느님과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어 졌으므로 – Image of God – 그 속성도 닮았다고 볼 수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사실 하느님에 대해, 또 그 분의 속성에 대해 잘 모릅니다. 불완전한 존재가 완전한 존재를 이해 할 수는 없기 때문 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이란 “하느님”에 대한 학문인데 우리들이 하느님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느님에 대한 공부라기 보다는 하느님 앞에서의 인간에 대한 공부라는 것이 더 타당한 말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헷갈리지요. “신학”을 제대로 공부했다면 “나 모르겠다”가 결국은 정답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해 어렴풋이 아는 만큼은 하느님을 이해 할 수 있지요. 우리 인간들이 우리 안에서 하느님에게서 부여 받은 완전성을 깨닫게 되면 비로서 하느님에 대해 어렴풋하게 알아 듣게 됩니다. Trinity라고 하는 삼위 일체를 한번 보도록하지요. 한분이시지만 위격이 3위라고 할때 우리들이 어렴풋이 알아 듣는 것은 혼자가 아닌 공동체라는 사실 입니다. 한분이시지만 혼자가 아닌 3위의 공동체라는 것이지요.
인간은 혼자서는 못 살아 가는 존재 입니다. 결혼 성소는 물론 함께 사는 성소지요. 그렇다면 혼자라고 못살겠느냐? 수도자들은 결혼 안하고도 잘만 산다더라. 하지만 수도자들도 수도 공동체에 소속 되어 있습니다. 결혼 안하신 single분들의 경우에도 이렇게 CLC라던가 하다 못해 반상회든 동창회든 교회 단체나 친목 단체 어디든 무엇이든 어딘가에는 소속 되어 살아 갑니다. 인간에게는 뭉치는 기운이 있기 때문 입니다. 이렇게 인간 존재 안에 공동체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하는 것 입니다.
To be is to be in relation to the every other being! - 모든 것과의 관계성 안에 존재 하여야 한다! Every other being이란 단어에 주목하여 주십시요. 이것에는 환경도 포함  됩니다.
CLCer인 여러분들은 모두 영신 수련 23번의 원리와 기초를 외우고 계시지요? 못 외운다면 오늘부터 외우도록 하십시요.
23. 원리와 기초
사람은 우리주 천주를 찬미하고 공경하고 그 분께 봉사하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조성된 것이다. 그외에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사람을 위하여, 즉 사람이 조성된 목적을 달성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하여 창조된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사물이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데 도움이 되면 그만큼 그것을 이용할 것이고, 또 방해가 되면 그만큼 배척해야 한다.
여지껏 긴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과연 우리들은 왜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의 답을 얻기 위하여  골똘히 생각하고, 연구하고 매달렸겠습니까? 철학자, 신학자, 시인 등등등…. 인간 존재에 대해 질문하고 그 답을 얻기 위하여 참 많은 수고들을 하였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들의 사부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영신 수련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십니다. 인간이 살아 가는 목적은 자기 자신의 영혼을 구하기 위함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천주를 찬미하고 공경하고 봉사해야 한다고 말씀 하십니다. 우리들이 살아 가야하는 목적은 물론 살아 가는 방법론까지 아주 선명하게 밝혀 주셨지요. 굉장한 깨달음 입니다. 이 목적에 방해가 된다면 건강 마저도 포기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강력한 문장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부께서 한 영혼이라도 구하기 위해서라면 다른 모든 것들은 단지 이용하는 것이라고 말씀 하셨지만 세월이 흘러 인류가 진화 되면서 이용을 하되 함께 공생하는 관계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3)        인간을 사랑을 하는 존재이다.
하느님의 속성은 무엇이지요? 맞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들도 하느님과 비슷하니까,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사랑 할 수 밖에 없는 존재 입니다. 만약 우리들이 사랑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사랑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왜? 하느님과 비슷한 존재이므로 사랑하지 않으면 영혼이 말라서 죽게 됩니다. 그럼 사랑을 하면 어떻게 되나요? 사랑을 한다 해도 죽습니다. 어차피 인간 모두는 죽게 되어 있기 때문에 죽는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존재 한다는 것은 “있음” 을 의미 합니다. To be is to love! – 존재 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한번 생각해 봅시다. 사랑을 하면 무엇인가 자꾸 주고 싶어 집니다. 기꺼이 희생을 합니다.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줍니다. 부모는 특히 어머니는 자녀들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까지도 바칩니다. 사랑이란 것이 기꺼이 나를 희생 할 수 있게 만든다면, 내가 없어 질 수 있게 만드는 것이라면 이것은 죽음의 개념 입니다.
자, 남녀 간의 사랑은 무엇이지요? Eros 입니다. 그렇다면 친구간의 사랑은? Filio 지요. Agape는 무엇입니까? 신적 사랑이지요. 우리들은 생명을 무조건 공짜로 받았습니다. 이 신적인 사랑을 가장 가깝게 할 수있는 것이 “엄마” 입니다.
21세기를 맞이하여 우리들이 생각하여야 할 key word가 3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여성과 어린이와 환경입니다. 생물학적으로 보거나 과학 적인 실험을 통해 볼 때, 여성들은 2가지 능력만 빼고 남성들 보다 우월하다고 합니다. 여성은 남성보다 muscle이 덜 발달 되었지요. 힘이 약합니다. 그리고 공간 인지 능력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외의 다른 모든 능력들은 남성보다 우월하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도 여성들에게 생명을 돌보고 care하는 임무를 맞기신 것 아니겠습니까? 불행하게도 우리 인류의 역사는 남성 중심의 힘에 의한 역사 였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여성들은 2등 시민으로 전락 하고 말았지만 인류가 보다 완전한 진화를 하기 위해서는 여권이 더욱 신장 되어야 할 것 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전 세계적으로 노동 착취를 당하는 어린이들의 문제와 날로 오염 되어 가는 환경을 보호하고 잘 돌 보아야 할 것 입니다. 이것들은 우리 모두가 살아 가는 동안, 죽는 날까지 가지고 살아야 하는  화두 입니다.
다시 “사랑 – Agape”로 돌아 가겠습니다. 사랑을 해도 죽고, 안해도 죽는다면 어차피 죽을 바에야 하고 죽는 편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To be is to love. 라고 말 할 수 있다면 To love is to give. 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 되었으므로 하느님의 길로 초대 받은 것이지요. 우리들의 생명을 비롯하여 우리들의 모든 조건들은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거저 주신 것 입니다. 왜 주셨습니까? 우리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주신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 교에서는 그리스도를 포함한 모두가 이 “사랑”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삶 안에서 To love is to give.를 실천 할 때 기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랑 받을 때도 기쁘지만 사랑을 할 때,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줄 때 기쁘고 행복 합니다. 사랑을 한번 물건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들은 여지껏 부모님에게서 많은 사랑을 받아 왔습니다. 생명을 받았고 사랑 받으며 성장 하였습니다. 우리가 성장 하면서 받은 사랑이 우리들 안에서 차고 넘치면 이것은 어디론가로 흘러 가야 합니다. 흘러 가야 건강해 집니다.
흐르고 흘러서 돌고 도는 circulation은 우주의 진리이기도 합니다. 지구를 보십시요. 지구는 자전하며 공전하고 있습니다. 돌고 있지요. 만약 돌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망가지게 됩니다. 살펴보면 모든 숙달된 것들은 돌고 있습니다. Circus에 가 보십시요. 모두 돌립니다. 공도 돌리고 접시도 돌리고 의자도 돌립니다. 돌릴 수있는 것은 모두 돌립니다. 이것은 우스개 소리 같지만 우리들의 삶 안에서도 적용 됩니다.
흘러가야 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주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To give! 무조건 주십시요. 줄 때 기쁩니다. 주는 것이 기쁨의 원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루를 지내면서 기쁘지 않다면 그것은 그날 누구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혼 성소는 기쁨의 원천이 정해진 것 - 사랑을 구체적으로 줄 대상이 정해진 상태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이 축복이라는 것 입니다.

(4)        그리스도교의 영성은 예수이다.
우리들은 흔히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그렇다면 영성 – spirituality - 이란 무엇일까요? 다른 교회, 예를 들어 불교의 영성은 자비심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우리들의 “영성”은 무엇일까요? 우리들은 CLCer입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 교회 안의 사람들이고 우리의 영성은 우리 교회 안에서 찾아야 하겠지요. 다른 모든 복잡한 것들은 다 접어 두십시요. 우리들의 영성은 “예수” 입니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짐으로 영성이 깊어 지고 그 분을 닮아 가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가톨릭 교회의 영성 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연결된 모든 가르침이 “사랑” 입니다. 또 하나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영성”은 공부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 가는 것이란 점 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셨습니까? 평생동안 가르치시고 모범을 보여 주신 것은 무엇 입니까?
(a)        사랑 :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들은 죽으니까.
(b)        용서 :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너무나 안쓰러운 나머지 승천하시기 직전에 가르쳐 주신 것.
(c)        두려워 하지 말라 : 성서 전반에 걸쳐 말씀하시던 것. 두려워 하지 말라. 겁내지 말라.
심리 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궁극적인 두려움의 대상은 죽음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존재가 “있음”인데 반해 죽음은 “없음” 이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우리들은 죽게 됩니다. 길을 가다가 맹수를 만나면 어떻습니까? 두렵지요. 두려우니까 도망 가게 됩니다. 안 두려워하면 어떻게 됩니까?  잡아 먹힙니다. 불에 타는 것을 겁내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타 죽습니다. 공포도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system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하셨지요. 두려워하지 않으면 우리는 죽습니다. 사랑도 죽는 것 입니다. 용서도 죽는 것 입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용서는 불가능 하기 때문 입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밤낮 남의 탓만 하게 됩니다. 용서하려면 내가 죽어서 상대방 밑으로 들어 가야 합니다. 용서도 죽음의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않아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사랑도 할 수 있고 용서도 할 수 있는 것 입니다. 두려워 하지 않아야 진정한 사랑도 하고 진정한 용서도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신앙인이 되려면 이 길을 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신앙인들이 순교 할 수 있었던 것 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지향하는 신앙인의 본 모습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겁내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 근거를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가톨릭 신앙의 정점이지요. 예수님께서 몸소 우리들에게 생생하게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만약 이 “부활” 사건이 없었다면 그리스도 교는 단지 좋은 이야기를 해주는 단체일 뿐 입니다. “부활”때문에 비로서 신앙이 되었습니다. “부활”이란 무엇입니까? 다시 살아 나서 영원히 사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 “겁내지 말아라. 다시 살아 난다!”
여러분들, CLC  영성을 살기 원한다면 하느님께 “부활 신앙”을 청하십시요. 이것이 여러 분들의 가슴안에 차 오를 때 여러 분들은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두려워하지 않을 때 죽을 수 있고, 진정한 사랑과 용서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진정으로 용서하고 화해 할 수 있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Karl Rahner S.J. 신부님의 Pre-Conceptional Knowledge (선험적 지식)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에 구멍이 하나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무엇인가 허전하게 느끼며 찾기는 찾는데 이것은 물질이나 사랑이나 또는 그 무엇으로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다는 것이지요. 이 허전함은 “절대자에게로의 귀의”를 하지 않는한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가 살아 있는한 종교는 계속 될 것 입니다. Religion이란 단어의 어원은 다시 묶는다는 뜻 입니다. 자 이제부터 1시간 동안 아까 드린 성서 귀절을 갖고 기도 하시기 바랍니다. 5시에는 이자리에서 미사가 있을 예정 입니다. 특전 미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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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 강론  - 루가 18, 1 – 8

+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 그 고을에는 과부도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하고 졸랐다. ○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 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기도 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과부에게서 어떤 모습을 발견 할 수 있을까? 절박함, 용기, 항구함……어떤 사람의 행동을 보면 그 사람 안에 어떤 정신이 있는가를 엿 볼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과부는 진정으로 억울함을 호소하며 재판관을 성가시게 만든다. 그녀의 마음 맨 밑 바탕에는 강한 믿음이 있음을 읽을 수 있다. 나는 억울한 일을 당했고 하느님께서 재판관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없었다면 그 용기와 실천력이 생길 수 없었을 것이다.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않으려면 강한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다. 기도는 한 두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간절히 간절히 원하는 것을 끊임 없이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것이다. 반드시 들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하는 것이다. 하소연하고 세상 불평을 하는 것이 아니고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정진하는 것이다. 여기 나오는 재판관은 귀찮아서 과부의 청을 들어 주지만, 우리들이 이렇게 강한 믿음으로 무엇인가를 한다면 이 산더러 들어져서 저리로 옮겨져라 할 때 옮겨질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힘이며 인간의 능력 중에  잠재 되어있는 힘이기도 하다. 결국에는 하느님의 뜻으로 이루어 지겠지만 인간의 노력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강한 의지력이 있다면 무엇인가가 이루어 진다. 단순한 신비 차원, 하느님께서 도와 주심도 있겠지만 실제로 우리들의 강력한 의지력이 우리들에게 내제된 힘에 작용 할 수도 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우주 안에는 많은 에너지들이 있다. 그 에너지들이 어떻게 서로 작용하는지 우리들은 잘 모른다. 물리학 적으로 이야기 하여 우리들의 능력 중에 근력, 정신력, 뇌파 등등등…..이런 모든 것들이 합쳐져서 무엇인가가 이루어져 간다. 이럴 때 어떤 에너지가  작용 할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 할 때는 강한 믿음으로 해야 하고 그 믿음은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반복하여 수련하는 중에 얻어지는 것이다. CLCer로써 생활 안에서 영신 수련을 꾸준히 기도하고 수련해 나갈 때 믿음이 자라날 것이고 하느님께서도 들어 주시고 모든 에너지들을 합하여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것을 오늘의 복음 말씀을 통하여 여러 분들이 알아 들어 주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