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김제준 이냐시오 (1796-1839, 44세)

성 김제준은 일명 시명으로 한국의 최초 사제인 김대건 성인의 부친이며 충청도 면천지방 솔뫼에서 태어났다. 조부인 김진후와 백부의 권면으로 입교하였고, 신앙생활을 위해 경기도 용인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짓고 살던 중 모방 신부가 입국하였을 때 찾아가 성세와 견진성사를 받고 아들 김대건을 모방 신부에게 맡겨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8월 사위 곽씨를 앞세운 밀고자 김여상 일당에게 체포되었다. 포청과 의금부에서 아들을 외국에 내보낸 국사범으로 처리되어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당해 한때 배교하였으나 형조로 이송되어서는 배교를 취소하고 신앙을 훌륭하게 지켜 9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자가 되어 인자하신 천주님의 나라로 들어갔다.

성 우술임 수산나 (1803-1846, 44세)

성녀 우술임 수산나는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15세 때 인천에 사는 교우청년과 결혼하여 남편의 가르침으로 입교하였다. 1828년 체포되어 사형 당할 뻔했으나 해산이 임박하여 두 달간의 옥고를 치른 후 석방되었는데 그때 당한 형벌과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해 평생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남편을 여의고 1841년 상경하여 교우들에게 의지하며 살다가 이간난의 집에 머무르게 되어 서로 돕고 살면서 수계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46년 5월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자 김 신부의 처소에 남아있던 여교우들과 이간난이 함께 피신하게 되었고 혼자 집을 지키다가 7월 11일에 체포되어 9월 20일 매를 맞아 거의 반죽음이 된 상태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여 하느님의 영원하신 사랑 안에서 살게 되었다.

성 한원서 베드로 (1836-1866, 31세)

성 한원서 베드로는 세례명이 요셉으로도 전해지고 있으며 일명 재권으로 충청도 진잠에서 태중교우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부모의 착한 모범을 따라 열심히 살았으며 진잠 지방에서는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박해를 피해 전주 대성동으로 이사한 후에는 아무런 직책 없이 헌신적으로 교회 일을 도우면서 모든 이의 모범이 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전라도 지방에까지 미치게 되어 이해 12월 대성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정문호, 손선지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부친이 친구를 통하여 석방 교섭을 벌이는 한편 옥까지 찾아와 배교할 것을 간청하였지만 “배교란 말은 부당합니다. 아버님이 아무리 그러셔도 소용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거절하였다.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여 참 아버지이신 천주님을 직접 뵈옵고 영원히 흠숭하게 되었다.

성 현경련 베네딕다 (1794-1839, 46세)

성녀 현경련은 성인 현석문의 누나이며 순교자 현계흠의 딸인데, 서울의 역관집 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17세 때 최창현의 아들과 결혼했지만 3년만에 남편을 여의고는 친정에 돌아와 삯바느질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도왔다. 남달리 신앙생활에 몰두하였고, 뛰어난 교리지식으로 여회장직을 맡아 외교인들을 가르치고 냉담자들을 권면하고 어린이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대세를 주는 열의를 가져 여회장으로서 교회일을 성심껏 도왔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동생 현석문과 함께 형리들에게 2차의 주뢰와 300여도의 장을 맞는 심한 혹형을 당하였다. 너무 심한 형벌로 온몸이 상처투성이였으며 피와 고름이 흘러 내렸다. 옥중에서 동생에게 신망애 삼덕을 발하는 내용의 편지를 써보내, 이 편지를 읽는 신자들에게 큰 감동이 되었다. 12월 29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여 신망애 삼덕의 원천이신 하느님 품에 안겼다.

성 임치백 요셉 (1803-1846, 44세)

성 임치백 요셉은 일명 군집으로 서울 한강변의 부유한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830년 경 처음으로 천주교를 알게 되었는데 입교하지는 않았지만 호감을 가지고 있으면서 천주교인들을 도와주기도 하고 천주교인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1846년 선주(船主)인 아들 임성룡이 김대건 신부와 함께 체포되자 아들이 갇혀있는 옹진수영을 찾아가 아들을 만나기 위해 천주교인이라고 속이고 자수하였다. 이를 계기로 김대건 신부를 만나 처음으로 교리에 대한 강론을 듣고 즉시 세례를 받고, 순교를 결심. 결국 9월 20일 6명의 교우와 함께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포도대장이 십계명도 외우지 못하면서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느냐 하고 말하자, 무식한 자녀들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부모께 효도를 할 수 있듯이, 나는 배운 것은 없지만 천주님께서 나의 아버지이신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대답을 하여 불충분한 교리 지식이지만 천주님께 향한 마음은 누구보다 열렬함을 나타내보였다.

성 장성집 요셉 (1786-1839, 54세)

성 장성집 요셉은 서울에서 태어나 한강변 서강(西江)에서 살았고 한약방에서 일을 하며 두 번 결혼하였으나 두 번 다 아내를 잃었다. 30세 경 천주교를 알기 시작하여 열심한 예비교우로 살다가 몇 가지 교리에 대하여 의심을 가져 천주교 연구를 그만두고 재산 모으는 일에 몰두하였고 세속적인 향락에 빠지기도 하였지만, 신자 친구들이 가르침과 권면으로 다시 신앙생활로 돌아와 자신의 죄를 뉘우치면서 보속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참회의 생활이 대단하여 자기 방에 틀어박혀 추위와 굶주림을 참아가면서 기도와 성서연구에만 몰두하였다. 1838년 4월에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았고, 1839년 체포되었다. 체포될 때 중병 상태여서 포졸들이 가마에 태우려 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포청까지 걸어갔으며, 포청에서도 형관들에게 맑은 정신으로 자세히 교리를 설명한 후 혹형과 고문을 기쁘게 이겨냈다. 5월 26일 치도곤 20대를 맞고 장사(杖死), 순교하여 성서를 통해 뵈옵던 하느님을 직접 뵈옵고 그 사랑 안에서 끝없는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다.

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1791-1839, 49세)

성 유진길은 일명 용심이라 했으며 소년 성인 유대철의 아버지로서, 서울의 유명한 역관집안에서 태어났다. 학문에 뜻을 두고 많은 서적을 읽던 중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읽고 교리를 터득한 뒤 입교하였다. 1824년 동지사의 수석역관으로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고 북경교회의 연락을 담당, 1826년 교황에게 성직자 파견을 간청하는 편지를 북경주교에게 전달하는 등 전후 8회에 걸쳐 북경을 왕래하면서 조선교회의 상황을 알렸다. 그 결과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되었고 1833년 중국인 유방제 신부, 그 뒤에 모방신부,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가 입국하게 되었다. 1839년 7월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주리형과 줄톱질 형을 받는 형벌에서도 의연한 자세를 지켜 믿음의 위대함을 보여주었고, 국법을 어겨 매국노와 공모한 사학의 무리라는 죄목으로 1839년 9월 22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모든 진리의 근원이신 전지하신 주님 품에 안겼다.



성 남종삼 요한 (1817-1866, 50세)

성 남종삼 요한은 충주지방에서 태어났으며 22세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가 되었으나 관직에 있으면서도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나라의 공식적인 의식이 있을 때는 교리에 지나친 조상숭배 행위에 참가해야 했으므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던 중 관직을 떠나 가정으로 돌아와 집안을 보살피며 신앙생활에 열중하고 외국신부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1863년에 생활의 궁핍으로 다시 승지의 관직에 일하게 되었는데, 1864년 이후 천주교에 반대하던 대신들이 박해를 탄원하자 1866년 천주교 박해령이 내려졌고 남 요한 역시 체포되어 6차에 걸쳐 베르뇌 주교, 다블뤼 부주교등 다른 교우들과 함께 엄중 문초당했다. 1866년 3월 7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홍봉주와 같이 참수형을 받아 하늘나라에서 순교 성인이라는 지위를 얻었다.

성 우세영 알렉시오 (1845-1866, 22세)

성 우세영 알렉시오는 일명 세필로 황해도 서흥의 향교골에서 태어나 총명한 재주로 18세 때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우연히 만난 김기호 회장의 가르침과 권면으로 관직에의 뜻을 버리고 입교했다. 서울로 올라와 정의배 회장에게 교리를 배우고 베르뇌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고향으로 돌아와 반대하던 부모와 가족들을 인내와 열정으로 권면하여 입교시켰다. 그러던 중 1866년 2월 16일 이웃 마을인 고둔리 공소에서 축일을 지내다가 유정률 등 5명의 교우와 체포되었으나 평양감영에서의 혹형을 이겨내지 못하고 배교하였다. 그러나 석방되자 배교한 것을 크게 뉘우치고 스승 정의배를 만나기 위해 상경하였다가 정의배의 집을 지키던 포졸들에게 자수하였다. 3월 11일 프랑스신부 둘과 정의배와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로 순교하여 천국의 과거에 훌륭하게 급제하였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1821-1846, 26세)

성 김대건은 최초의 한국인 신부로서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에서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 우르술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1836년 16세 때에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최양업 토마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그 이듬해 마카오에 도착, 사제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하였다. 1844년에 부제품을 받고 그 해 8월 17일에 상해 부근 긴가함(Kin-ka-ham)이라는 교우촌의 성당에서,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 주교로부터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입국하여 선교 활동에 힘쓰는 한편 외국신부들의 입국을 위해 노력하다가 1846년 6월 5일 체포되어 사제생활 1년 1개월 만인 1846년 9월 16일에 한강변 새남터에서 군문효수의 형을 받고 장렬하게 순교하였다. 40차의 신문을 받는 동안 김 신부의 탁월한 지식과 외국어 실력에 탄복한 일부 대신들은, 김 신부를 배교시켜 필요한 인재로 이용하려고 했지만, 도리어 관리들에게 복음을 전하자 끝내 사학의 괴수라는 죄목을 붙여 사형을 선고하였다. 순교의 현장에서 김 신부는 큰 소리로 “나의 마지막 때가 왔다. 여러분, 귀를 기울여 들어주시오. 천주를 위해 나는  이 세상을 떠납니다. 여기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됩니다. 여러분도 죽은 다음 영원한 행복을 얻고자 생각하시면 천주교 신자가 되십시오.”라고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