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1805-1839, 35세)

성 최경환은 두 번째 한국인 사제인 최양업의 아버지로 충청도 홍주의 다락골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원래 교회창설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왔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에 열심히 하였다. 1836년에는 큰아들 최양업을 모방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맡겨 마카오로 유학보냈다. 그는 타고난 성질이 괄괄해서 불같이 일어나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했으나 믿음의 정신으로 많은 노력을 한 결과, 주위 사람들은 그의 본래 성품이 온순한 것으로 생각했었다. 1839년 초대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곧이어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순교자들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였으며, 교우들을 위로 격려하면서 돌보아주던 중 1839년 7월 31일에 40여명의 교우와 함께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아들을 나라 밖으로 내보내어 신학공부 시킨다는 죄가 더 추가되어 남달리 혹심한 고통과 형벌을 받았다. 9월 11일 최후로 곤장 25도를 맞고 그 다음날인 12일에 옥중에서 일생을 마쳐 순교의 놀라운 기쁨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아갔다.

성 황석두 루가(1813-1866, 54세)

성 황석두 루가는 일명 재건이며 충청도 연풍의 부유한 양반집에서 3대독자로 태어났다. 성장해서 부친의 뜻에 따라 과거보러 상경하던 도중 한 천주교인과 사귀게 되어 입교했다. 그 뒤 부친의 반대를 무릎쓰고 3년 동안이나 벙어리 행세를 해가면서 교리서적을 탐독하는 한편 박대하던 부친과 가족들을 권면하여 입교시켰다. 그의 뛰어난 교리지식과 덕행으로 주교와 신부들의 복사를 거쳐 회장으로 임명되어 활약하였고, 또 페레올 주교에게 절제와 금욕을 위해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받고 독신으로 생활하면서 오로지 교회일에만 전념하였다. 다블뤼 주교를 도와 교리서를 번역하며 교회서적 출판에 관계하던 중 1866년 3월 충청도 홍주의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주교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고, 3월 30일 충남보령의 갈매못에서 성직자들과 장주기 등과 함께 군문효수 형을 받고 순교하여, 천상 교회의 가족이 되었다.

성 박종원 아우구스띠노(1792-1840, 49세)

성 박종원은 일명 이선으로 서울 중인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매우 가난하게 살았으니 모친과 함께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고, 성장해서 교우인 고순이와 결혼하여 3남매를 두어 모범 된 가정을 이루었다. 교리를 많이 알고 있어서 전교에 힘을 쏟으면서 임종자에게 대세를 잊지않고 주었고, 그의 성품이 온화하여 성을 내는 일이 없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체포의 위험을 무릎쓰고 옥에 갇힌 교우들과 연락하는 한편 뿔뿔이 흩어진 교우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하며 용기를 북돋아주다가 10월 26일 체포되었다. 그 이튿날 체포된 아내와 함께 포청에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기꺼이 이겨내고, 부인 고순이가 순교한지 한 달째 되던 1840년 1월 31일 당고개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부인과 함께 영원한 천국의 복된 가정에 들어갔다.

성 유대철 베드로(1826-1839, 14세)

소년 성인 유대철은 성인 유진길의 아들이며, 서울의 유명한 역관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의 모범과 가르침을 받아 입교하여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천주교를 적대시한 어머니와 누나에게 끊임없는 괴로움을 당했는데 그 때마다 어머니에 대한 효성을 보여주었으나 신앙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았으며, 어머니와 누나를 위해 항상 기도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많은 교우들이 영웅적으로 순교하였고 아버지도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순교하기로 결심하여 자수하였다. 재판관들은 어린 소년을 배교시키기 위해 천만가지 방법을 다 사용하였지만 소년 유 베드로의 마음은 변치 않았다. 허벅지의 살을 뜯어내며 "이래도 천주교를 믿겠느냐?"하고 으름장을 놓는 형리에게 "믿고 말고요. 그렇게 한다고 제가 하느님을 버릴 줄 아세요?"라고 대답했다. 화가난 형리가 다시 시뻘건 숯덩이를 입에 넣으려 하자 "자요"하고 입을 크게 벌려 형리들을 놀라게 하였다. 관원들은 어린 소년을 죽이면 군중이 반발할까 두려워 1839년 10월 31일, 형리를 들여보내 목에 노끈을 잡아매어 죽이도록 하였다. 가장 어린 순교 성인 유대철은 아버지와 함께 순교하여 우리 민족의 모든 어린이들의 신앙적인 모범이 되었다.

성 김효주 아녜스(1816-1839, 24세)

성 김효주는 성녀 김효임의 동생으로 서울 근교 밤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여읜 후 가족들과 함께 입교하여 언니인 김효임 골룸바, 동생인 글라라와 함께 수정(守貞)을 결심하고 기도와 덕행에 노력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해 4월에 이사해 살고있던 경기도 고양땅 용머리에서 언니 김효임과 함께 체포되었다. 가혹한 형벌은 받았지만 한마디 소리 없이 침묵 속에서 기도하면서 참았고, 옷을 벗겨 공중에 매달아 번갈아 때리는 학춤이라는 형벌을 받기도 하였으며, 남자 죄수들이 있는 감옥에까지 가두어졌으나 주 은총으로 큰 힘을 얻어 남자들을 물리치기도 하였다. 9월 3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언니보다 20여일 먼저 순교의 화관을 쓰고 천국의 영원한 가족이 되었다.

성 김효임 골룸바(1814-1839. 26세)

김효임은 성녀 김효주의 언니로 서울 근교 밤섬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부친을 여읜 후 가족과 함께 입교하여 두 여동생 글라라와 김효주와 함께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였다. 병약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성심껏 돌보아주어 그 덕행과 아름다운 모범에 교우들뿐 아니라 외교인 들까지 감탄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 해 4월 경기도 고양땅 용머리에서 김효주와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매우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받았고, 이렇게 혹형과 고문을 이겨낸 김효임은 동생과 함께 형조로 이송되었으며, 형조에서 두 자매는 포청에서의 불의한 고문과 능욕에 대해 항의, 결국 자신과 동생에게 능욕을 가한 포졸들은 귀향가게 되었다. 그 뒤 5개월 동안 옥에서 병과 고통과 싸우며 순교를 준비하던 중, 9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먼저 순교한 동생의 뒤를 따라 장렬하게 순교하여 천상의 신랑이신 주님 품으로 올라갔다.

성 최창흡 베드로(1787-1839, 53세)

성 최창흡은 서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일명 여칠이라 했고, 성녀 손소벽의 남편이었다. 어려서 입교하였는데 1801년에 이복형인 최창현이 순교한 후로는 냉담한 생활을 하다가 30세경 결혼한 뒤 아내 손소벽과 함께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1821년 아내와 함께 대세를 받고, 이때부터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때 전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혹형을 당해야 했고, 형조로 이송되어서도 3차의 혹독한 형문을 받았다. 형장에 끌려가면서 옥졸에게 "여감방에 있는 내 아내와 딸에게 가서 내 운명을 슬퍼하지 말라고 전해주게. 그것은 너무나 인성을 따르는 감정이어서 진실한 신자에게 마땅치 않는 일이니, 오히려 주님을 찬미하고 이러한 큰 은혜를 주님께 감사하며 잊지말고 나를 따라오라고 전해주게"하고 말하였다. 가장으로서 남은 가족들에게 눈물겨운 신앙적인 당부로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한 성인은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게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의 영예를 얻었다.

성 남명혁 다미아노 (1802-1839, 38세)

성 남명혁은 일명 문화라고 하였고 성녀 이연희의 남편으로 서울에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젊을 때에는 난봉꾼들과 어울려 난폭하고 방탕한 생활을 했지만 30세경 입교하여 생활이 완전히 달라졌고, 유방제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는 더욱더 열심 하여 이광헌과 함께 회장으로 임명되어 예비자를 가르치면서 성직자를 보필하는 일과 교회 내 신심운동을 일으키는 등 온 힘을 기울여 노력하였다. 1839년 예비교우의 밀고로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고, 집에 숨겨둔 제의와 경본 및 주교관이 발견되어, 서양신부를 체포하기에 혈안이 된 포청과 형조의 관헌들에게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받았다. 이러한 어려움을 참아내면서, 아내 이연희에게 "이 세상은 잠시 머무르는 곳일 뿐, 우리의 본고향은 천국이니 천주를 위해 죽어서 광명한 곳에서 다시 만나기를 바라오"라는 격려의 편지를 써보낸 후 5월 24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성 이윤일 요한(1823-1867, 45세)

성 이윤일 요한은 일명 제헌으로 충청도 홍주에서 교우집안에서 태어나 경상도 문경의 여호목골에 살며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의 여파로 11월에 가족들과 마을 교우 30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문경 관아에서 3일 동안 혹형과 고문을 받고, 배교하지 않은 교우들과 상주로 이송되었다. 상주에서 혹독하고 엄한 문초를 받았으며 다시 김회장 형제와 함께 사학의 두목으로 지목되어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혹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자 1867년 1월 21일 대구 남문 밖 관덕정으로 끌려나갔고, 집행관이 선고문을 낭독하자 요한은 희광이에게 돈을 꺼내 주며 "나를 위해 수고하는 자네에게 줄터이니 받아서 요긴하게 쓰게나. 그대신 부디 한 칼에 내 목을 베어주게나"하였다. 참수형으로 순교하여 천국의 영원한 가족이 되었다.

성 정의배 마르꼬 (1795-1866, 72세)

성 정의배 마르꼬는 서울 창동에서 태어났으며 유업을 쌓으면서 진실을 바탕으로 신중하게 살아오던 중 1839년 기해박해 때 프랑스 신부들의 순교 장면을 직접 목격하고 감동하여 그 즉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 후 신앙생활로 인해 1845년 페레올 주교가 입국하자 회장으로 임명되어 순교할 때까지 20여 년을 헌신적으로 교회일을 하였다. 1866년 2월 베르뇌 주교가 체포된 후 주교 하인의 밀고로 체포되어 3월 11일 두 프랑스 신부와 우세영과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여, 진리의 원천이신 주님의 나라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