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박병관 사도요한신부님.jpg : 박병관 사도요한 신부님의  부활성야 강론 (서강대 교목처)



제16차 이냐시오 영성 침묵피정을 지도해 주신  박병관 사도 요한 신부님의 부활성야 강론을 나눕니다.

 출처: 서강대 교목처


부활성야 미사에서 주례를 해주신 박병관 신부님께서 해주신 강론을 이곳에 공유합니다. 사진은 신부님께서 강론 초입에 언급하신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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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운데 있는 ‘부활초’가 예수님의 부활 현존을 가장 자연스레 드러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을 예배하면서도 그 현존을 매개할 형상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부활초의 불과 빛 속에 계신 그분의 아이콘(icon)으로 이 이미지를 모셔놓아 보았습니다.

이 밤 제가 여러분들과 함께 만나고 가슴에 담고 싶은 그분의 모습입니다. 저의 이 부활선물은 만성적 우울증을 앓았던 루닉(Leunig)이라는 호주 성공회 카투니스트가 그린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곧 수난 속에 부활을 사는 의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선명하게 포착했습니다.

30년 전 제가 길을 찾던 청년이었을 때의 일입니다. 그 때는 잘 몰랐었지만 나중에 돌이켜보니, 부활하신 주님을 사도 바오로가 만난 것 같이 직접 만나 뵙고자 은근히 소망하고 있었습니다. 그 갈망이 주님께서 부활 후에 복음의 제자들을 찾아주셨던 것처럼 제 마음 문을 먼저 열고 들어와 방문해주셔서 생긴 것인지 지금도 알 길이 없습니다.

저의 소망을 채워주시려 했던지 어느 날 그분이 불러주셨습니다. 그것은 (굳이 말로 말해보자면) 헤아릴 수 없는 어떤 신비스런 목소리 혹은 인격과의 만남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만남이 남긴 흔적은 마음을 다해 하느님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사랑하고 찾으라는 명령의 울림이었습니다. 놀랍고도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내안에 발견되던 고뇌 속 기쁨과 평화, 말 못할 자유, 그리고 구원으로 체험된 온전한 생명의 꿈틀거림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부활하여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직접 눈으로 뵈었냐고요?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하게 되는 부활하신 예수님 체험에 속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체험은 우리를 그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자녀로 불러주시고 늘 다가와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말할 수 없는 위로와 자비에 뿌리를 둡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빈 무덤’을 체험하게 됩니다. 저의 경험이 제자들의 그 체험과 유사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저에게는 그렇게 여겨집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은 우리 삶의 ‘빈 무덤’이라는 하느님 부재의 현실 가운데 살아 있는 역설적인 신비입니다. 여러분 각자는 부활하신 주님 체험을 어떻게 알아보고 있으며 말해 왔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꼭 사도 바오로와 같이 뵙고 싶다는 생각 없는 욕심은 오래 전에 버렸습니다. 그처럼 큰 은혜를 통해 사도가 받은 사명의 크기와 그가 치러야 했던 영웅적 희생과 말할 수 없는 고뇌와 고난을 곰곰이 생각하노라면 정신을 차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또 만나고 싶은 것은 제 마음만의 소망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가요?

모든 이의 눈에 부활하여 살아계신 예수님의 영광이 분명하고도 완전히 드러날 파루지아(Parousia)의 때까지 우리의 부활하신 주님 체험은 부정할 수도 지울 수도 없는 현실로서 은혜로운 빛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그 체험은 하지만 여전히 포착하고 규정하기 어려운 미스터리입니다. 그 점이 우리의 부활신앙의 어려움을 설명해줍니다.

우리는 너무나 구체적이고 힘 있게 느껴지는 세상의 악과 어둠, 부정의와 삶의 비극 그리고 부조리한 사건들 앞에서 압도되어 자주 절망하고 용기를 잃고 포기하라는 유혹을 받습니다. 세상은 ‘너희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라는 비아냥거림과 도전적 질문을 던짐으로써 우리 부활신앙을 흔들어 댑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 세상 안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는 않으면서 마음을 다해 하느님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사랑하고 찾는 사명에 충실히 서지 못하고 자주 주저앉습니다.

그러기에 순례의 길을 가고 있는 우리는 ‘주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라는 교회의 장엄한 케리그마(kerygma)를 듣고 또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를 통해 우리의 부활신앙은 세상이 주는 수난과 시련 가운데서 단련되어 성숙해지고 우리를 그리스도교적인 희망의 인간으로 변모시키는 것입니다.

오늘 부활성야에 우리가 모인 것은 서로에게 교회의 몸이 되어주고, 우리 서로와 세상을 위해 “주님이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신다!”라고 선포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과연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전례 안에 모여 하나가 됨으로써 우리는 나보다 더 큰 위로부터 내리는 힘 안에 자리 잡고 자신의 한계와 허약함을 벗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집합적 인격에 속함으로써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힘과 늘 접촉합니다.

이 힘은 요한복음이 밝혀주듯이 세상의 어둠을 이기고 승리하시는 하느님 자신의 생명의 힘이며 빛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부활은 마음을 다해 하느님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사랑하고 찾으며 살았던 의인 나자렛 예수의 승리입니다. 또한 우리 안에 있는 의인의 승리입니다. 더 엄밀히 말하자면 승리의 보증입니다. 요즈음 정치권에서 옥쇄파동으로 시끌벅적합니다만, 예수 부활은 하느님의 옥쇄가 어디에 또 어떤 삶에 찍혀있는지 분명히 알려줍니다.

부활하면 흔히 기쁨을 떠올립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진정 값어치 있는 부활의 기쁨은 단련된 그리스도교적인 희망의 인간 속에 태어나고 힘을 발휘합니다. 부활은 한낱 지나가는 우리 주관의 심리상태가 아니며 우리의 개별적 체험을 넘어가는 객관적 현실입니다. 그러기에 부활신앙을 살고자 하는 우리의 근본적인 관심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에너지 장에 들어가고 자리잡기를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서 부활을 발견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일에는 문법이 있습니다. 그 두 가지를 이야기해 봅니다.

무엇보다 부활은 수난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능력과 존재의 힘이 소진되어진 그 죽음의 끝자락에서 동터오는 여명의 빛이 바로 부활입니다. 그러기에 수난경험 없이 부활경험은 없습니다.

오래 전 희랍 정교회의 부활성야 전례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어둠이 깊은 자정부터 동터오는 새벽녘까지 계속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반복적으로 찬양대에서 천사들처럼 시편을 노래하다가 역할이 끝나면 부모 곁으로 돌아와 쉬고 잠을 자곤 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모든 예배의 몸짓과 집중력과 기력이 소진되고 나서 ‘빈 무덤’ 같은 나가 된 연후에야 비로소 그 자리에 하느님의 세계와 순수한 은혜의 세계가 태어나기 시작하는지 모릅니다. 바로 그럴 때 비로소 하느님을 예배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는지 모릅니다. 그날 저는 어슴푸레 동터오는 새벽빛을 맞이하면서 부활을 새롭게 이해하였던 것 같습니다. 고단한 전례에서 뿐 아니라 우리 삶의 현실 속에서도 똑 같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차리는 일은 살아있는 관계 속에서 알던 예수 그리스도 그분과의 구체적 역사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먼저 구체적인 사랑의 관계에 들어가는 일 없이 그분의 현존을 알아차림은 불가능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주 어렵거나 더디게 일어날 것입니다. 완전한 부활체험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인격과 조우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각자의 삶에서 그분을 알아차리고자 소망한다면 먼저 그분을 사랑하고 그 분 안에 머물도록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부활 체험의 시작은 어떤 두려움이었습니다. 아직 위로와 기쁨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인격의 현존을 만나고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험 후에도 구원을 가져오는 이 두려움은 그들의 부활체험 전체 속에서 여전히 자리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부활 사건은 어리둥절하여 자신의 길을 딱 멈추고 곰곰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기에 그렇습니다.

과연 내 길은 옳은가? 고난 받는 하느님의 종이며 부활한 하느님의 의인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 하느님의 의로움 앞에서 내 길의 의로움을 나는 얼마만큼 주장할 수 있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이런 부활 체험의 어리둥절함과 두려움을 통과하고 난 이후에야 비로소 새로운 마음을 길러내는 깊은 회심이 가능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제가 종교학과에서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사상사와 이론을 가르칩니다. 그렇다보니 서강 예수회 공동체 형제들은 대화중에 조금 심심해진다 싶으면 가끔 “그런데 신비주의자께서는”하면서 장난을 겁니다. 한 선배 예수회원은 씩 웃으면서 그러나 자못 진지한 어조로 장난의 끝을 장식합니다. “‘신앙의 신비여!’하면 그만이지 안 그래?”

그렇습니다. 이제 순박한 신앙의 정신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신비를 선포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 안에 기뻐합시다. 뭐니 뭐니 해도 우리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예수님과 우리의 부활을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