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 3,30)
 

지난 여름 2주 동안 40여명의 동료 수사들과 함께 아루페 먼스(Arrupe Month)를 가졌습니다. 아루페 먼스는 신학과정에 있는 수사들이 서품 전에 사제의 삶에 대해 숙고하는 시간으로, 여러 선배 신부님들을 초대하여 사제로서의 삶에 대한 그분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듣고 나누는 시간입니다. 더불어 8일 피정을 통해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진정 바라시는 사제의 모습은 무엇인지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시간을 가집니다. 말하자면, 사제서품을 준비하는 수사들에게 현실에서의 사제의 참 의미는 무엇이고, 또한 고충은 무엇인지, 그리고 사제서품을 준비하는 기간 동안 각자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사제의 삶을 어떻게 살아 낼 것인가를 고민해 보는 그런 시간입니다.

이 시간 동안 저에게 다가온 사제의 여러 모습들 중, 가장 크게 다가온 것은 강론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어렵지 않으면서도 간결한 강론을 통해, 듣는 이들이 친근하게 느끼면서도 각자의 영혼에 울림을 줄 수 있는 그런 강론을 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왔습니다. 사실 마음은 이러하지만, 그런 강론을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뿐 더러, 이 모든 것 이전에 ‘내가 사제로서의 삶을 살아 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 또한 같이 올라옵니다. 하느님의 자비로 사제로서 삶을 허락 받는 경험은 아마 내 삶에 있어서 가장 멋지고 가슴 벅찬 일일 거라 생각되지만, 한편으로는 사제의 길을 걷겠다고 나선 후 8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사제로서의 삶을 선뜻 받아들이기엔 두렵고 조심스러운 면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저에게 피정 동안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역설적인 모습들을 보여주셨습니다. 서로가 상충되어 보이지만, 사실 아주 조화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들 말입니다. 십자가의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역설적이게도 고통을 넘어, 환희와 기쁨의 희열을 체험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에게 주어진 소명, 즉 하느님의 뜻을 이루었을 때 느끼게 되는 그런 기쁨 말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온전한 죽음으로 진리를 발한 십자가의 모습은 저에게 두려운 마음에 앞서, 그분을 따르려는 제 마음을 희망으로 뛰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뜻을 따랐을 때 오는 그런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통해 사라지셨지만, 온전하고 완벽한 하느님의 점유로 인해 예수님은 오히려 우리에게 더욱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두려웠던 저의 마음은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그 자리를 조금이 아니라 온전히 내어달라는 하느님의 초대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이는 비록 내 존재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역설적으로 제 모습은 더욱 또렷해질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이는 나와 하느님의 사이의 경계가 사라져 내 자신이 온전히 하느님께 잠길 때 오히려 제가 제 자신으로서 오롯이 살아 갈 수 있겠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제 자신의 내적 태도를 내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하느님의 의지를 따르려고 방향지었을 때 오는 자유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찌 보면 전적으로 제한된 자유라서 제 자신의 존재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 자유 안에서 제 자신은 더욱 분명해 짐을 보게 됩니다. 물론이 모든 것을 제 자신이 다 받아들이지는 못했지만, 조금씩 조금씩 익어갈 거라 믿습니다.

아루페 먼스 피정을 통해 하느님을 진정 사랑한다는 것은 진정 두려운 일지만, 그 또한 내가 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리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려운 마음이 올라오면 올라 오는 대로 그런 마음을 안고 이 길을 걸어갑니다. 하느님과 하나 되는 이 길에 무엇 하나 버릴 것이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내 안의 결점을 몰아내서 완덕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그 또한 내 안에 존재할 때, 그래서 그것을 껴안을 수 있을 때 하느님과 일치를 체험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흔히 완전함을 이야기할 때 결함이 없는 것을 완전함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로는 결점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가 저희들을 그분과의 일치, 즉 완전함으로 이끈다고 믿습니다. 아마 없음도 있어야 있음이 완성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길을 따라 걸어가고자 하는 이 삶은 그 분의 사랑이 내 안에서 제자리를 찾도록 그 분의 의지에 순종하는 삶이며, 또한 참된 사제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8)

[글_안세진 수사]

2005년에 예수회에 입회한 안세진(바오로) 수사는 현재 미국 버클리에 있는 예수회 신학교(Jesuit Schools of Theology of Santa Clara University)에서 서품 신학 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이 글은 예수회 후원회 소식지 <이냐시오의 벗들> 10월호에 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