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예수회 후원회 소식지(이냐시오의 벗들)에 올랐던 글 입니다.

따스한 정감을 제게 준,

기억에 남는 글로 느껴져, 옮겨서 올립니다.

시간의 흐름 안에서 나와 상대를 알아차려가는 아름다운 모습이 저에게 다가오더군요.

이미 존재하고 있는 많은 일들을 저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동감이 많이 가더군요.   



 

 

 

 

 

 

네가 사랑하는 만큼

김준희 구델리아 / 제주교구 조천성당

 

 

중년에 접어들면서부터 친구들이나 주변 자매님들로부터 남편과 맞지 않아 도저히 못살겠다는 하소연을 많이 듣는다. 한 친구는 남편이 밥을 먹을 때마다 콧구멍을 벌렁거리는데 그게 그렇게 보기 싫어 못살겠다 하고, 한 자매는 부부 모두 한 본당에서 아주 활발한 활동을 하며 겉으로는 아주 완벽한 부부행세를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 두 사람은 남남이 되는 생활을 오랫동안 해 왔다며 신앙적으로 인간적으로 몹시 힘들어 했다. 어떤 작가는 남편이 책 읽는 것을 너무 싫어해 자기와 수준이 안 맞아 살 수 없다고도 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 온 두 사람이 인연을 맺어 오랜 시간 함께 살다보면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생이란 업 앤 다운, 잘 나갈 때도 있고 못 나갈 때도 있고 상대가 예쁘게 보일 때도 있고, 하는 짓마다 어쩌면 그렇게 미운짓만 골라 하나 싶을 때도 있다. 그렇게 저렇게 살다가 중년쯤 접어들거나 시련이 닥치면, 그 동안의 좋은 기억은 다 어디로 가고 평소 잊고 지냈던 상대에게서 받은 상처들만 하나 둘 새록새록 살아나, 평소엔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던 배우자의 이런저런 모습들이 미운 모습으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나도 그랬다. 남편이 돈 잘 벌어오고 세상의 명예까지 지니고 있을 때는 못마땅한 부분도 그런대로 참아줄 만했지만 상황이 반전되어 모든 것이 어려워지고 남편이 무능해 보이기 시작하자 남편의 행동, 말 하나하나가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오래 묵어 먼지 낀 예전의 아주 사소한 섭섭한 일들까지 꼼꼼히 들춰내어 미움의 불에 자꾸 던져 넣다 보니, 그냥 넘어 갈 수 있는 일들도 지나치지 못하고 가시 돋친 말로 톡 쏘아주어야만 직성이 풀릴 지경이 되었다. 그래도 신앙인이라 양심은 있어서 기도할 때면 하느님께 이런저런 핑계로 내 미움에 대한 그럴듯한 합리적인 핑계를 대면서 하느님 우리 미카엘 어떻게 좀 해주세요 했다. 그러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언제나 작은 기도도 귀여겨 들으시는 하느님께서 나의 기도대로 오냐, 손 봐주마 나서시면, 그것도 큰일이다 싶어 미카엘이 맘에 안 들지만 그래도 당신은 많이 사랑해 주세요 라고 말을 바꾸었다. 즉 손익계산서를 따져 본 것이다. 그렇잖아도 미운데 상황이 더 나빠지면 결국 나만 더 힘들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 앞에서 잔머리를 최대한 굴렸는데 하느님은 아주 간단한 답을 하나 주셨다.

 

                       네가 사랑하는 만큼 나도 사랑하마...

 

         이 말씀을 이해하기까지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느님은 한없이 자비로우시며 영원에서 영원까지 무한한 사랑 그 자체이신데 왜 내가 사랑하는 만큼만 사랑하겠다 하신 것일까? 그럼 내가 미카엘을 사랑하지 않으면 당신께서도 사랑하시지 않겠다는 뜻인가? 참으로 수수께끼 같은 답을 듣고 몇 년의 세월을 보내며, 기도 좀 하라면 당신이 많이 하잖아?  직장 좀 알아 보라면 나이가 많아 받아 줄 곳이 있겠어?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이 싫다고 말하는 남편에게 깊은 절망감을 느끼며 나 나름대로 참으로 외롭고 힘든 시간을 견뎌내다가 이젠 더 이상 내려 갈 곳도 없구나 싶은 순간, 남편을 다시 보았다. 남편은 희고 참 좋은 피부를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새 얼굴엔 검버섯이 군데군데 피어나 있었고 돈 아끼느라 넓은 땅 관리도 직접 하다 보니 손이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때 고액 연봉의 자존심 강한 남자가 아내 식당에서 손님을 시중드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니 갑자기 측은한 마음이 밀려오며 눈물이 났다. 그래나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저 사람은 얼마나 힘이 들까어렸을 때부터 부유한 집에서 불편함 없이 자란 남편이 아닌가? 미국에서 계속 살았더라면 저 사람은 참으로 행복했을지도 모르는데 문화적인 환경이 전혀 다른 이 한국 땅에서 더구나 이 고생을 하며 살아가자니 내색은 않지만 속마음이야 오죽하겠나 싶어 그날 밤 남편 손을 잡고 당신 많이 힘들지? 내가 지혜로운 여자였으면 우리가 고생을 덜 했을 텐데 미안하다고 했다.

 

         우리가 제주도로 내려오면서 돌이킬 수 없는 사기를 당한 것은 어느 한쪽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 실정에 어두웠던 우리 부부의 무지였고 또 누구에게도 조언을 듣지 않았던 우리의 교만 탓이었으니 두 사람 모두의 책임이었다. 하지만 지금 어려운 이 시간들이 언젠가 큰 축복으로 돌아올 것임을 믿고 우리 싸우지 말고 잘 살자 손가락 걸며 약속하고, 사회를 떠나온 오십대 중반의 남자가 다시 사회로 복귀할 기회가 이 한국땅에는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는 남편에 대해 부담스러운 모든 기대를 하나하나 끊어나갔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은 먹었지만 힘들 때마다 불쑥불쑥 올라오는 남편에 대한 답답함을 끊어버릴 수가 없어, 삭막해진 제 마음에 예수님의 사랑을 나눠 주십사 열심히 기도하며 매일매일 남편의 좋은 점 한가지씩을 봉헌해 드렸다. 예수님 오늘 저는 미카엘의 이런 점을 사랑합니다. 그 사랑을 당신께 드릴께요. 다음날은 또 다른 좋은 점을 봉헌해 드렸는데 당황스럽게도 며칠 지나니 더 이상 칭찬할 게 통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마음에 안 차는 부분들을 봉헌하라면 몇 달이라도 채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정작 남편의 장점들을 생각하려니 일주일도 못 채우고 그만 꽉 막혀버리는 것이었다. 남편에겐 이도록 예쁜 구석이 별로 없는 것일까? 칭찬할 점이 이리도 없는 사람인가? 곰곰 생각해 보니 그것은 남편에게 장점이 적은 것이 아니라 그 장점들을 인정하지 못하고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내 자신이 문제였다. 우리 부부 두 사람의 문젠, 언제나 남편 쪽에 있고 내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생각이 나를 불행하게 하는 모든 근원이었던 것이었다. 결국 내 마음의 미움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의 지극히 이기적인 문제였음을 깨닫고, 남편에게 가졌던 내가 바라는, 내가 원하는 남편의 모습을 다 배제하고 그저 주님 앞에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가장 작은 한 인간의 모습에서 출발하여 다시 남편을 보기 시작하니 평소 어린애 같은 모습은 순수한 모습으로, 나를 배려해주고 염려해 주는 모습은 자상한 모습으로, 자꾸 내 곁에서 서성이는 모습은 나를 귀찮게 하는 것이 아닌 지금 나는 외롭다는 표현으로 다가 왔다.

 

         그렇게 남편에 대한 아주 작고 사소한 일들에 감사하며 주님께 봉헌하는 날들이 길어 질수록 하느님께서 남편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하였다. 촛불을 켜고 함께 기도하지 않았다고 투덜거렸지만, 남편은 이 깊고 외로운 삶의 여정에서 이미 나무와 새와 작은 들꽃들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과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하느님 안에서 자신을 조금씩 조금씩 비워내고 있음을 알게 되어, 벌레들이 죽는다며 제초제를 뿌리지 않고, 풀을 깎다가 작은 들꽃을 피해가는 남편의 모습들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래남편의 지금 모습 그대로를 감사하자. 사는 것이 힘들긴 하지만, 남편도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린 시절부터 외국에서만 자라 인맥도 백도 없고 문화적인 차이도 극복하기 힘든 이 한국 땅에서, 더구나 제주도 이 외진 곳에 발이 묶여 사면초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빠졌는데 저렇게 견디어내고 있는 것만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 동안 남편의 수고로 잘 먹고 잘 살았으니 이제 내가 고생한다고 억울해하지 말자부부라는 게 뭔가? 한쪽이 힘들면 다른 쪽이 받쳐주고 다른 쪽이 쓰러지면 내 쪽에서 일으켜주며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이 진정한 부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보이고, 즐거워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가난한 비천함을 통해 당신을 새롭게 만날 수 있는 내적 성장을 주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렸다.

 

         네가 사랑하는 만큼사랑은 내가 눈을 뜬 만큼 보이고 내가 사랑하는 만큼 더 많이 느낄 수 있다. 내가 마음을 열어 상대를 사랑하기 시작하니 그에 대한 모든 것이 감사한 은총으로 다가온 것처럼, 결국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당신이 사랑을 조금만 하시겠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사랑하기 시작해야 무한하신 그분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정말 그렇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내 마음에 사랑이 없으면 상대의 사랑도 사랑으로 느껴지지 않고, 내 마음이 닫혀있으면 온 세상 넘치는 하느님의 사랑도 문을 닫은 것처럼 보인다.

 

         미워하는 것, 상처받았다고 하는 것 모두가 지극히 주관적이다. 지극히 주관적이라는 말은 모든 열쇠를 나 스스로 쥐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타인에 의해 나의 삶을 통제 받을 것인가 아니면 나 스스로 통제할 것인가는 본인의 선택에 달려있다. 그 선택에 따라 내 삶의 색깔도 달라진다. 이왕이면 하느님 안에서 행복하게 살자. 그러기 위해서는 남의 변화하기를 기다리느라 헛된 세월만 보내지 말고, 지금 이 순간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모든 사랑에 감사하며 기쁘게 살자. 그러다 보면 매일매일이 기적이 되고 찬미가 되고 영광이 된다. 나이가 많아 사회 복귀는 절대 불가능할 것이라는 모든 이의 생각과는 달리, 몇 달 전 하느님께서는 남편에게 자신의 스팩에 딱 맞는 너무나도 감사한 새 직장을 주셔서 남편은 지금 열심히 일하며 하느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으로 하느님의 길을 기쁘게 가고 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고 모든 것을 가능케 하고 또 모든 기적은 사랑에서 출발한다는 것, 내가 사랑하는 만큼 내가 감사하는 만큼 하느님의 사랑도 보인다는 것,

요즘 남편을 바라보며 새삼 느끼고 있다.